김사민 경제부 기자

[미디어SR 김사민 기자] 지난 11일부터 신청을 받기 시작한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이 개시 일주일 만에 10조원을 돌파했다.

18일 현재 기준으로 전국 1598만 가구가 재난지원금을 신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어림잡아 국내 2049만 가구 가운데 약 80%가 신청한 셈이다.

다만 재난지원금 14조 가운데 아직도 4조원이 대기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돈을 준다는데도 신청을 주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만난 시중은행의 한 팀장급 직원은 "집 사람이 재난 지원금을 도대체 언제 신청할 것이냐고 닦달한다"면서도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이리저리 보느라 아직도 신청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긴급' 재난지원금인데도 불구하고 서둘러 신청하지 못하고 주변상황을 살펴봐야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실마리는 의외로 청와대에서 풀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난지원금 신청이 시작되기도 전인 지난 7일 재난지원금 60만원 전액을 기부한다고 밝혔다.

사실 '60만원'이란 금액은 개개인에 따라 큰 돈일수도, 아니면 아주 적은 금액일수도 있다. 다만, 대통령이 60만원을 기부한다는 사실은 언론이 속보로 보도할 만큼 대단한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그날 문대통령 부부의 재난지원금 기부 의사를 전하면서 "기부는 돈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60만원에 수억원의 가치를 부여한 강 대변인의 한마디는 화룡점정이 되어 그대로 사람들의 마음 속을 파고 들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기부를 선언하자 정부, 정치권은 물론 금융권에도 '기부 공표'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자발적 기부'라면 사실 혼자 조용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금융지주사들은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임원들이 전액 기부에 동참하고 직원들에게도 자발적 기부를 권한다는 내용까지 알리고 말았다.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셈이다. 착한 일도 절차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뒤따라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있었다. 농협은 지난 5일 직원들과 상의하지도 않은 채 임원과 간부급 직원 5000명이 재난지원금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자료를 성급히 내보내 논란을 빚었다.

지난달 메리츠금융그룹도 "연봉 5000만원 이상 임직원 2700여명 전원이 기부에 참여한다"고 밝혔지만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합의도 거치지 않은 발표임이 드러났고, 직원들은 마치 재난지원금을 강탈당하는듯 억울해했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이후 업계 1위 신한금융그룹이 선제적으로 재난지원금 자발적 기부 동참 의사를 밝히자, 당일 오후 우리금융그룹도 눈치 보듯 기부 의사를 밝혔다.

이후 기부 릴레이에 대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기부를 조장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며 '관제 기부'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KB금융그룹, 하나금융그룹은 기부는 하되 기부사실을 알리지는 않겠다는 쪽으로 방침을 선회했다. 

18일에는 금융위원회의 수장인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재난지원금 전액 기부 사실을 밝혔다.

재난지원금 지급 일주일 만에 주요 금융권 간부들이 너도나도 기부 의사를 밝히고 나선 것이다.

아무리 자발적 기부를 권장한다고 해도 직원들 입장에선 눈치가 보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임원은 "재난지원금에 대해 아예 관심도 없었는데, 본부장급 이상 임원들은 대부분 쓰기 보다는 기부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면서 "다른 직원들과 재난지원금과 관련해서 얘기해본 적도 없고, 기부하자고 독려하는 분위기도 아니다"라고 조심스러워 했다.

문제는 직속 상사가 기부 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도 당사자의 의도와는 달리 부하 직원에게는 은근한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중은행의 한 직원은 재난지원금을 신청했냐는 질문에 "아직 신청하지 않고 상황을 두루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신청할지도, 기부할지도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가족 할당량도 있으니 혼자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인데, 임원들이 기부하니 눈치가 보여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면 "지원금을 왜 기부하느냐"는 가족들 등쌀이 만만치 않다.

회사에 가면 "나는 기부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임원들 때문에 이리저리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비교적 직급이 낮은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기부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아니므로 눈치 보지 않고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지급한 지원금인 만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취지에 걸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과장급 직원은 "소비 활성화로 내수 경제를 살리는 것과 기부를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두 가지 선택 모두 의미가 있다"면서 "재난지원금을 받아 활발히 사용하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것이 오히려 취지에 맞는 일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당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카드사 재난지원금 신청 페이지에 기부 선택란을 포함하라는 지침으로 '기부 피싱' 오명까지 얻게 된 정부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권층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지만 기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기부는 '조용히', 소비는 '활발히' 하는 것이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내수 경제의 구멍을 조금이나마 메우고 소상공인의 삶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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