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은 현금 확보로... 미래경쟁력은 R&D 투자로 극복
AI 등에 대해선 국가 차원의 대비책 필요...인재 수혈이 관건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에 대비하느라 기업들이 분주하다. 유동성 확보에 사활을 거는 한편 ‘초격차’도 놓칠 수 없는 화두다. 하지만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히는 AI(인공지능)기술이나 빅데이터, 로봇, 자율주행차, 가상현실 등의 기술 경쟁력에서 한국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기업들은 위기 속에서도 지속적인 R&D(연구개발‧Research&Development) 투자로 각자의 ‘초격차’ 왕좌를 다시 노리고 있다.
#생존 위한 필수 전략이 된 ‘초격차’
초격차는 전 삼성전자 권오현 CEO(최고경영자)가 2018년 삼성전자의 경영 전략을 설명할 때 사용한 용어다. 비교 불가능한, 넘볼 수 없는 격차를 의미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굴기는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를 확보하기 위한 모든 방면에서의 혁신에서 비롯됐고 그 중심에는 기술경쟁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대수 기업들은 이같은 사실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판매‧관리 비용과 고정 지출 등을 고려하면 투자를 늘리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기업들은 지난해 R&D 투자를 4조원 가까이 늘렸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대표 박주근)가 국내 500대 기업 중 사업보고서를 제출하고 R&D 비용을 공시한 208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R&D 투자액은 총 53조 4529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8년보다 7.8% 증가한 수치이며, 매출에서 R&D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0.25%포인트 높아졌다. 같은 기간 매출이 0.8%, 영업이익이 40.7% 급감한 사실을 고려하면 미래 성장동력 확보가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기업들이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는 반증일수도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실적 악화에도 R&D투자액을 2018년보다 9.2% 늘렸다. 이에 따른 지난해 R&D 투자 총액이 조사 대상인 208개 기업 중 1위로, 20조 1929억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측은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도 기존 투자 계획을 유지하겠다고 밝히며 초격차 확대 의지를 다진 바 있다. 당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4세대 10나노급 D램과 7세대 V낸드 개발로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 확대에 주력하겠다"면서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차별화된 제품으로 신성장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고 자신감을 나타낸바 있다.
#R&D 직접 챙기는 그룹 총수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경기도 수원 삼성종합기술원을 방문해 "한계에 직면했다고 생각될 때 다시 한 번 힘을 내 벽을 넘자"며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올해 들어 6번째 현장 경영이다. 지난 1월 화성사업장 반도체 연구소와 브라질 마나우스 공장을 방문한 데 이어, 2월 EUV(극자외선) 전용 반도체 생산라인, 3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을 연달아 찾았다. 이 부회장이 찾은 곳은 인공지능(AI)과 5세대 이동통신(5G), 자율주행, 마이크로 LED, 초미세공정 등 삼성전자 ‘미래 성장동력’ 연구의 중심지다. 총수가 직접 연구소를 살피며 R&D를 독려하는데 앞장 선 셈이다.
삼성전자는 4차산업혁명의 뿌리인 AI에 R&D 역량을 쏟아붓도 있다. 현재 운영 중인 삼성전자 AI 연구센터는 한국, 미국, 영국, 캐나다, 러시아 등 5개국 7개소에 달하며 세계적 석학의 영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2018년 6월 AI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세바스찬 승(H.Sebastian Seung·승현준) 프린스턴대 교수와 다니엘 리(Daniel D.Lee) 코넬테크대 교수를 영입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위구연 하버드대 교수를 영입하기도 했다.
AI 기술력을 지닌 스타트업 인수에도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6년 11월 미국 실리콘 밸리 소재 AI 플랫폼 개발 기업 '비브 랩스'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자연어 기반 AI 플랫폼을 갖고 있다. 2017년 11월에는 대화형 AI 서비스 스타트업 '플런티'를 인수했다. 삼성전자의 국내 첫 AI 스타트업 인수 사례다. 삼성전자는 스타트업 기술을 바탕으로 AI 비서 빅스비(Bixby)를 개선하고, 올해 내 모든 스마트기기에 AI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신가전’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LG전자 역시 R&D 투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구광모 ㈜LG 대표의 지난해 첫 대외 행보는 LG의 인재 유치 행사인 ‘LG 테크노 콘퍼런스’였다. 2012년 시작해 인공지능, 올레드, 신소재 재료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갈 기술 분야 석·박사 과정 인재들이 참석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구 대표는 “사이언스파크를 비롯한 LG의 R&D 공간에서 최고 인재들이 미래 기술을 선도하며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반영하듯 LG전자의 지난해 R&D 투자 규모는 4조344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다. 이 중에는 스타일러, 건조기 등 신가전 분야의 비중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 정의선호(號)도 R&D에 집중하는 건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의 연구개발(R&D) 투자 비용이 지난해 처음으로 3조 원을 돌파했다. 현대모비스 역시 R&D에 들인 금액이 1조 원에 육박하면서 현대차그룹의 미래차 기술 선점을 위한 투자가 지속 확대되고 있다. 현대차는 자율주행차, 플라잉카, 로보틱스, 모빌리티 서비스 등 미래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자율주행차와 관련, 지난해 합작법인을 설립한 미국 앱티브와 함께 공동 R&D를 진행해 2023년까지 부분자율주행(레벨3) 기능 상용화에 나선다.
최근에는 싱가포르에 신개념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혁신) 랩(Lab)인 '현대 모빌리티 글로벌 혁신 센터(HMGICs)'를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작년 국가 경쟁력 순위 1위에 오른 싱가포르에서 R&D부터 비즈니스, 제조에 이르는 미래 모빌리티 가치사슬 전반을 혁신할 새로운 사업과 기술을 개발하고 검증할 계획이다. 이는 기존 '협업을 통한 혁신'을 내세웠던 개방형혁신센터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확장한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어...국가적 지원 필요
그러나 한국의 R&D 지표는 다소 부족하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중이 0.2%포인트 올라 글로벌 기업 평균 이상인 3%를 넘어선 수준이다. 지난해 유럽연합(EU)의 R&D 스코어보드에 따르면 상위 10개 기업의 매출 대비 R&D 비중은 평균 11.9%로 집계됐다. 이는 삼성전자의 지난해 R&D 비중인 8.8%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미래 성장동력의 토대가 될 AI기술 개발 및 활용 수준도 뒤처지고 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NIA ㆍ원장 문용식)이 발표한 ‘2019 NIA AI Index-우리나라 AI 수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AI 각분야 지표에서 한국은 1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절반 수준 이상되는 지표가 단 한 건도 없을 정도로 주요국과의 격차가 벌어졌다.
특히 한국 AI 관련 기업 수는 지난해 6월 기준 26개로 8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가장 많은 미국(2028개)의 1.3%에 불과했다. 이어 중국(1011개), 영국(392개), 인도(152개), 이스라엘(121개), 독일(111개), 일본(40개) 등 순으로 AI 기업수가 많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미디어SR에 “사실 AI 기술의 경우는 개별 기업이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구글이나 애플 같은 거대 글로벌 기업은 AI 전문가를 몇 십억에 달하는 연봉을 주고 모셔온다”면서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국가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의 고차원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지난해 VR(가상현실)‧AR(증강현실) 관련 정책토론회 에서도 SKT 전진수 상무는 “인재가 너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개발해야겠지만 대부분의 교육 과정이 세계 최고 전문가를 통해야 하는 만큼 인재 영입 전략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바 있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내 산업계, 학계, 연구원 등에서 AI 관련 연구를 하는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전화·이메일 설문을 실시한 결과, AI 인력이 수요보다 얼마나 부족한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50~59%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가장 높은 비율(20.7%)를 차지했다. 응답자들이 답한 AI 인력 부족률은 평균 60.6%로, 필요인력 10명중 4명 밖에 충당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AI 인력을 확보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실무형 기술인력 부족’(36.7%·복수응답)이라는 답이 가장 많았고, 이어 ‘선진국 수준의 연봉 지급이 어렵다(25.5%)’는 점도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