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민영 디자인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황각규

롯데그룹의 명실상부한 2인자.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은 롯데에서만 40년을 일했다. 사원에서 그룹 지주사 부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경영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후문이다. ‘역대급 물갈이’로 불린 지난해 임원인사에서도 황각규 부회장 측근 인사들은 대부분 유임되거나 핵심 요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체 임원 700여명 가운데 계열사 대표 22명을 포함한 약 20~25%(140명~175명)의 임원이 대거 교체됐다. 그런데도 이른바 ‘황각규 라인’으로 분류되는 호남석유화학(이하 호남석화) 출신, 학교 동문 등이 요직을 지키거나 유임되면서 오히려 황 부회장의 영향력을 확인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간 롯데그룹 안팎에서는 ‘롯데그룹 황금인맥은 황각규 라인’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이번 임원 인사로 3각체제가 완성됐다. 송용덕 호텔&서비스 BU장(Business Unit, 사업 부문)이 롯데지주 공동대표로 새롭게 선임되면서다. 황부회장이 그룹의 전체 전략과 기업 인수·합병(M&A), 커뮤니케이션 등 대외 업무를 총괄하고, 송용덕 부회장이 그룹 내 인력 개발‧인사‧노무 등을 맡는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3각 체제가 황 부회장에게 쏠린 무게중심의 균형을 잡으려는 신동빈 회장의 의도가 있다고 본다고 전한 바 있다.

황각규의 존재감과 그룹 내 위상은 신동빈 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옥살이를 할 때 한층 부각됐다. 황각규는 신동빈 회장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우는 한편 그룹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데도 한 몫했다. 특히 지난 2017년 신동빈 회장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이후 황각규는 신 회장과 나란히 롯데지주 대표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그 해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명실공히 ‘롯데그룹 2인자’로 올라섰다.

황각규는 마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79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이하·호남석화)에 입사했다. 그가 롯데그룹과의 오랜 인연을 맺게 된 건 1990년 신동빈 회장을 만나면서. 신동빈이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후계자 수업을 받을 때 황각규가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신동빈은 일본에서 나고 자라 당시 한국어가 서툴렀는데 황각규가 유창한 일본어로 신동빈을 보좌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결국 1995년 말 신동빈 회장은 황각규 당시 호남석화 차장에게 “글로벌 롯데”를 만들자며 당시 없던 ‘국제부’까지 신설해 그를 영입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서 역할부터 경영 보좌까지 지근거리에서 신동빈을 보필해와 신동빈 회장의 오른팔로도 불린다.

신동빈 회장이 제안했던 대로 황각규 부회장은 해외 진출과 기업 인수에 적극 나서기 시작해 비약적인 성장과 수익성 향상을 꾀했다. 그런 황각규는 롯데의 해외 진출과 M&A의 산증인이다. 많은 M&A가 그의 손을 거쳐갔다. 2010년 말레이시아 석유화학 기업 타이탄, 2012년 하이마트, 2015년 KT렌탈, 2015년 더뉴욕팰리스호텔, 2016년 삼성SDI 케미칼사업 부문 및 삼성정밀화학 등 ‘조(兆) 단위’ M&A도 여럿 있었다. 이런 경험이 모여 그는 ‘M&A 3원칙’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비싸게 사면 절대 안 된다’는 것, ‘아무리 매력적인 회사라도 기존 사업과 연관성이 떨어지면 고려하지 않는 것’, ‘모기업을 위태롭게 할 여지가 있는 곳은 배제하는 것’ 등이 그 원칙이다.

게다가 그동안 황 부회장과 그룹 내 2인자 자리를 두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던 소진세 전 롯데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마저 퇴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황각규 시대의 막이 올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황각규를 신뢰하며 그룹 2인자로 올렸다. 평소 예의 바르면서도 인간미가 넘친다는 신동빈 회장은 최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임원 회의에서 “사업할 의지가 있는 것입니까”, “말로만 잘할 것이란 얘기는 그만하라”는 등의 뼈있는 말을 던져 임원들을 힐난했다고 한다. 신동빈 회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형 리더’, ‘경청하는 경영자’로 알려져 있었다. 임원 말을 많이 듣고,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사업 구조 혁신과 그룹 쇄신을 위해 감춰온 발톱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펑소 언론 노출을 꺼리는 신동빈 회장이 최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언급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모두 버리고 역대 최대 규모의 점포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유통사업이 주력인 국내 백화점과 대형마트 중 채산성이 없는 점포 200개(약 20%)를 올해 폐쇄하겠다고 했다.

신동빈은 1955년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도 일본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신격호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인 다케모리 하쓰코 씨(78·현 시게미쓰 하쓰코)로 일본인이다. 신동빈의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아키오. 일본인 부인과 결혼한 신 부회장은 1남2녀를 두었다. 가족들은 모두 일본에 살고 있어 1~2주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생활한다. 신동빈의 장남 신유열씨도 일본 여성과 결혼해 신 명예회장, 신동빈에 이어 3대가 내리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가족사를 썼다.

신동빈 회장은 지난해 7월 열린 하반기 사장단회의를 마치며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와 공감하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배경으로, 신 회장이 아직 ‘오너 리스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꼬집는다. 현재 신동빈은 롯데그룹 경영비리 재판과 관련해 2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으나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신동빈은 스키 매니아로서 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해서도 힘쓰기도 했다. 16명의 국제스키연맹 집행위원에게 평창동계올림픽 시설 현황과 교통, 기온, 강설 등 올림픽 준비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2018년 1월 국내 10대그룹 총수 가운데 처음으로 성화 봉송주자로 직접 성화를 들고 뛰기도 했다. 2017년에는 국제스키연맹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사실상 무박에 가까운 일정으로 스위스를 다녀오는 강행군을 펼치기도 했을 정도다.

신동빈은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일본 롯데상사 이사로 입사했으며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국 롯데그룹에 발을 내디뎠다.

故신격호

1921년 빈농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故신격호 명예회장은 19살 때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늘의 롯데를 일궈냈다. 신 회장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은 신 회장 일가의 생활철학을 잘 나타낸다. 겉으로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을 멀리하고 실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황각규 부회장은 신동빈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지만 신동빈과 함께 신격호의 경영철학을 배운 ‘멘티’이기도 하다. 지난 1월 별세한 신 명예회장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황각규 부회장은 “(신 명예회장이)저한테 항상 하시던 말이 '너 가봤어?'였다"고 했다. 해외사업 진출을 모색할 때 신격호 명예회장이 ‘인구가 많다’며 인도를 제안하자 경영진은 전반적으로 사람이나 인프라 등이 ‘느리다(한국과 차이가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가봤느냐고 물어보곤 했다는 것이다.

故신격호는 ‘손가락 경영’으로 대표되는 황제 경영 방식을 고수했다. 신 명예회장이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대로 사업이 진행되도록, 카리스마를 떨쳤다는 의미다. 그는 롯데쇼핑의 지방 점포 개점이나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는 등의 굵직한 현안은 물론 호텔롯데 객실의 벽지나 타일, 커튼 색깔까지 직접 골랐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평소 작업복 차림으로 영업이 끝난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둘러보고 담당자에게 세부적인 관리 내용을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묻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1등석에 혼자 탑승했다는 사실 등은 재계에서 꽤나 알려진 애기다.  2011년 구순의 나이로 롯데월드타워 공사현장을 직접 살펴볼 정도였다. 때문에 롯데그룹은 신격호가 지시하는 대로 사업이 진행되고 그의 결심 없이 이뤄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철저한 ‘신격호 직할체제’라고도 불려 당시 각 사업의 수장들은 권한이 다른 그룹보다는 작은 편이었다.

故신격호는 신문과 우유 배달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우유 배달 시간을 반드시 지켜 입소문이 났고,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신격호의 신용과 성실함에 반한 한 일본인은 그에게 선뜻 사업 자금을 내주면서 신격호 명예회장은 비로소 ‘사업가’로의 첫 발을 내딛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故신격호는 선반(절삭공구)용 기름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웠다가 2차 대전으로 가동해보지도 못한 채 전소시켰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한 데 이어 새로 도전한 껌 사업이 다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열정과 근성은 더 빛을 발한다. 이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을 데리고 ㈜롯데를 설립하고, 껌에 이어 과자의 중공업이라 불리는 초콜릿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면서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대기업 창업주 1세대에 이름을 올린다.    

송용덕

1955년생으로 황각규와 동갑내기다. 양정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경영대학원에서 호텔관광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발표된 정기 임원 인사로 송용덕 롯데그룹 호텔 서비스 BU장(Business Unit‧사업부문)이 그룹의 구심점인 롯데지주 대표이사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롯데지주는 기존 신동빈 황각규 2인 대표 체제에서 송 부회장이 더해져 3인 대표체제로 변경됐다. 신 회장이 그룹 ‘원리더’로서의 중심 역할을 맡고 ‘송·황’ 두 오른팔 왼팔이 회장을 보좌하는 삼각형 구도의 리더 체제가 만들어 진 것이다. 송 부회장은 인사, 노무, 경영개선 업무를 담당하며 그룹의 인재육성, 조직 업무 효율을 통해 그룹의 근본적인 역량 강화에 주력하게 된다.

송용덕은 1979년 롯데호텔이 개점한 그해에 입사해 30년 넘게 한 우물만 판 호텔 전문가다. 호텔롯데 출신으로서 대표이사 사장자리에 오른 첫 인물이기도 하다. 활발한 해외진출과 안정적 경영으로 호텔롯데의 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호텔롯데에서 롯데호텔월드 총지배인, 부산롯데호텔 대표를 거쳐 호텔롯데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엔 호텔&서비스 BU장으로 롯데그룹의 전문경영인 부회장단 시대를 이끌고 있다.

송용덕 부회장은 기본부터 챙기는 꼼꼼한 경영 스타일의 소유자다. 특히 롯데호텔모스크바 개관 당시 철저한 서비스 교육으로 현지에 롯데라는 이름을 드높혔다. 그는 고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호텔 직원인 ‘도어맨’부터 꼼꼼하게 가르쳤다. 웃는 표정, 문을 열어주고 인사하며 고객을 안내하는 방식까지 하나하나 직접 챙겼다. 도어맨이 바뀌면서 호텔 전체의 분위기도 밝아졌다. 또 추운 겨울이 6개월 이상 이어지는 점을 고려해 화장실 안에 온열바닥을 시공했고 러시아 호텔 가운데 최초로 한국형 비데를 설치했다. 이런 노력으로 러시아인에게 생소했던 롯데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비스가 좋은 호텔로 이름을 알리며 현지에서 가장 성공한 해외호텔의 상징이 됐다.

송용덕 부회장은 호텔롯데의 해외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임직원들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해왔다. 그는 (회사의) 해외진출이 지속될 텐데 영어 실력이 곧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떄문에 영어를 못하면 진급을 시키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송 부회장은 채찍만 휘두르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영어 말하기 경연과 직원 대상 외국어 교육을 진행했고 성과를 낸 직원에게 보상을 제공했다.

합리적인 성향의 송 부회장은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신격호 명예회장의 집무실을 점거했을 때,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그는 신동주 전 부회장을 ‘외부인’으로 칭하며 “퇴거를 통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송 부회장은 "상대방은 총괄회장 위임장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총괄회장이 말했더라도 회사에는 직원 채용규정과 인사규정이 있고 내부 결재절차가 있다"면서 "나도 대표이사지만 대표 1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고용하고 해고하고 발령내는 것은 위법하고 부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진세

전 롯데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이자 현재 교촌에프앤비 대표. 소진세 전 위원장은 신격호 명예회장의 복심으로 불렸지만 지난해 12월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42년간 몸담은 롯데를 떠났다. 공석이 된 정책본부 수장 자리를 놓고 황각규와 소진세 사장 중 누가 이어받을지 업계의 관심이 높았다. 결국 황각규가 정책본부를 대신해 신설된 경영혁신실 수장에 오르면서 2인자 자리를 확실히 다지고 소진세는 롯데를 떠났다.

소진세는 1950년 5월 8일 대구에서 태어나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롯데그룹의 간판 CEO로 롯데를 떠나기 전까지 그룹 내에서는 연배가 높은 편으로 맏형 역할을 했고 경영권 분쟁, 검찰 수사 등 외풍을 이겨내는 데도 제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롯데그룹의 2인자로 꼽혔던 故이인원 전 부회장이 키운 인물로, 이 전 부회장이 롯데쇼핑 대표를 맡고 있던 당시에 소진세를 마음에 들어해 신격호 명예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할 때마다 항상 데리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유통 전문가로서, 1977년 롯데백화점에 입사해 롯데백화점 상품본부장, 마케팅본부장, 롯데미도파 대표이사, 롯데슈퍼 대표, 코리아세븐 대표이사 등을 두루 거친 뒤 2000년 롯데쇼핑 이사로 승진했다. 소진세 전 위원장은 30여 년 동안 유통업에 종사한 스스로를 ‘유통의 산증인’이라 자평한다. 2006년 롯데슈퍼를 처음 맡았을 당시 롯데슈퍼 매장 수는 50여 개에 그쳤지만 그가 물러나기 직전인 2013년 말 매장 수는 350여 개를 훌쩍 넘어섰다. 매출도 같은 기간 4천억 원 수준에서 2조3천억 원가량으로 늘었다. 롯데쇼핑의 창립멤버로 활동하면서 롯데 유통부문의 질적·양적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진세는 추진력이 강하고 언행에 거침이 없어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 번 맡은 일은 저돌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유통업계의 마당발이라고 알려져 있다. 노병용 전 롯데물산 대표와 대구고등학교 9회 동기 동창으로 비슷한 과정으로 성장해 그룹 내외에서 라이벌로 인식됐다. 노 전 대표는 소진세를 두고 “추진력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기본으로 삼고 있는 인생의 신조는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자’다. 부지런히 전국 점포를 돌아다니며 직접 업무를 챙기는 꼼꼼함까지 갖췄다. 이런 점 때문에 2016년 12월 6일 신동빈 회장이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할 때, 소진세 전 위원장과 함께 준비하는 등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그가 교촌치킨 브랜드를 운영하는 교촌에프앤비(F&B)의 대표이사를 맡게 된 배경에는 교촌치킨 창업주인 권원강 전 회장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권 전 회장과 신임 소 회장이 같은 학교 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임병연

‘리틀 황각규’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황각규 부회장과 호남석화, 대학 동문으로 인맥이 겹친다. 1989년 호남석화에 입사해 황 부회장과 인연을 맺은 임 부사장은 신규사업, 기획 업무를 담당하다 2009년 롯데그룹 정책본부로 자리를 옮기며 대표적인 ‘황각규 라인’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롯데미래전략센터장, 정책본부 비전전략실장을 거쳐 2017년부터는 롯데지주 가치경영실장을 맡았다. 임 부사장이 황 부회장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얼어왔다며 ‘리틀 황각규’로 평가되는 이유다.

현재 임 부사장은 롯데케미칼 대표이사에 선임되면서 인사 관련 잡음의 중심에 섰다. 오랜 시간 화학업계를 떠나 정책분보, 비전전략실정 등에 있다가 돌연 롯데케미칼 기초소재사업 부문 대표를 맡게 돼서다. 이에 임 부사장을 둘러싼 자질론이 일고 있다.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의 대표가 대거 교체됐음에도 임 부사장이 유임된 데 대해 그룹 안팎에선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황 부회장의 입김으로 임 부사장의 자리를 지킨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 성과도 부진했다. 올해 3분기까지 롯데케미칼은 연결기준 매출 11조6965억원, 영업이익 9564억원 등으로 전년 실적인 매출 12조7011억원, 영업이익 1조8670억원 등에 비해 크게 부진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화학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됐다는 점을 감안해도 임 부사장의 경영능력이 부족했다는 게 업계 안팎의 전반적인 평가다.

그룹 안팎에서는 이런 임 부사장에 대해 황 부회장의 후계자인 동시에 롯데그룹 차기 실세라는 여기는  시선도 적지 않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임병연 대표의 경우 황각규 부회장과 서울대 화학공학과 선후배 사이로, 황각규 부회장이 2008년 롯데그룹 정책본부 국제실장으로 승진한 이듬해에 임병연 대표가 정책본부 국제실로 자리로 옮기는 등 두 사람의 교집합이 많은 편”이라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김교현

황각규 부회장의 호남석화 라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김교현 화학 BU장은 1984년 호남석화에 입사하며 롯데그룹과 인연을 맺고 오랜 기간 황 부회장과 함께 손발을 맞췄다. 지난해까지 롯데케미칼 대표이사(사장)를 역임하다 화학 BU장에 선임됐다. 현재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임병연 부사장과 함께 롯데케미칼의 3인 대표체제를 이루고 있으며 그룹의 화학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신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며, 신 회장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 동행했다. 신 회장의 '글로벌 롯데' 그림을 실행할 핵심 조력자로, 올해는 미국 에탄분해설비(ECC) 등 대규모 투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김교현 BU장은 합작투자와 대규모 증설을 통해 롯데그룹의 화학사업 확대에 힘쓰며 원료와 제품 다변화로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롯데케미칼과 롯데첨단소재가 합병한 통합 롯데케미컬이 지난 1월 출범하면서 김교현BU장은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그룹 내 화학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출신으로 잔뼈가 굵은 화학 전문가다. 생산지원팀과 신규사업팀을 지휘하면서 말레이시아 타이탄 인수와 성장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해외 현지문화의 이해도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교현의 해외사업 역량은 현지문화 적응력과 친밀도에서도 나온다.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융합돼 현지 클라이언트에게 신뢰를 준다는 평가를 듣는다.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은 2007년 카타르페트롤리엄이 100% 지분을 보유한 '카타르 인터미디어트 인더스트리 홀딩스'와 석유화학 콤플렉스 합작계약을 맺었을때의 일화가 회자된다. 그해 10월에 합작사업 준비 과정에서 김교현은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라마단 기간에 현지인과 똑같이 단식하며 회의를 진행해 파트너사의 신뢰를 얻어냈다.

그러나 김교현이 롯데케미칼 사장에 취임한 뒤 롯데케미칼에서 사고가 잇따라 발생해 외형 확장에 치중해서 안전관리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김교현은 2018년 주주총회에서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적극적 투자와 철저한 현장점검으로 안전한 업무환경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잇따른 사고에 이같은 약속이 무색해졌다. 2018년 1월 대산 BTX공장의 벤젠 누출 사고, 3월에는 롯데케미칼과 베르살리스 합작법인인 롯데베르살리스 여수공장에서 화재와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대산 BTX공장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했으며 3개월여 만인 7월 다시 여수공장 화학물질 저장소가 폭발했다. 최근에도 서산 대산공단 내 롯데케미칼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인근 지역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큰 폭발인데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사고에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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