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 원칙(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지 600일이 지났습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경영계는 물론 자본시장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국민 모두의 소중한 돈이 모여 있는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 기업 경영에 건강한 개입을 한다는 의견과 연금 사회주의가 우려될 정도로 과도하다는 의견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동시에 단순 의결권 행사를 넘어 기업의 비재무적 정보를 토대로 한 투자 의사 결정과 주주권 행사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일반적인 투자 방법론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이어지는 책임투자 확대 계획이 갖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공적 연기금이 투자 수익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투자 철학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미디어SR은 이번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국민연금이 어떤 기업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지,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았습니다. [편집자 주]

지난해 3월 열린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상장사들의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시작되면서 국내 주식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향방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를 도입하면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공개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금융기관에 돈을 맡긴 투자자(수탁자)들에 대한 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막고 투자자의 권리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지침’을 말한다. 달리 말해 금융기관이 투자자의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상장사의 각 안건에 대해 의결권 찬반 여부를 사전에 공개하는 것도 스튜어드십 코드의 일환이다. 투자자에게 정보를 성실하게 공개한다는 취지다.

다만 의결권을 사전에 공개하는 기업은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 보유한 기업이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비중 1% 이상을 차지하는 기업에 한한다.

국민 연금은 국내 상장기업 7곳 중 1곳에서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주식시장의 ‘큰 손’이다. KT와 포스코, 네이버, KT&G, 신한지주, 하나지주 등 9개사의 경우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며, 국민연금이 2대 주주로 있는 기업은 170여 곳에 달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대체로 기업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거나 과소배당 등 주주 환원 정책이 미진한 기업들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사전공개한 기업은 96곳으로, 이 중 코스피 40개 기업 82개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이사의 보수 한도에 대한 반대가 26건으로 가장 많았고 △사외이사 선임 25건 △감사위원 선임 15건 △정관변경 7건 △사내이사 선임 4건 등으로 그 뒤를 이었다.

또 기업지배구조원이 산정한 ESG 등급이 낮을수록 국민연금이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확률이 높았다. 특히 지배구조 부문에서 2년 연속 C등급 이하를 받은 기업들은 25곳 중 22곳이 국민연금의 반대를 받았다. 환경 부문에서 2년 연속 저조했던 기업 47곳에는 모두 반대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 보유한 기업은 약 90곳으로, 이 가운데 최근 2년 연속 지배구조 등급이 C 이하인 곳은 효성, 농심, 아세아 등이다.

효성은 올해 주총에서 조현준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한다. 조 회장은 최근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어 국민연금의 결정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올해는 롯데, 현대, 신세계 등 유통 빅3 기업 상장사의 지분 보유 목적을 '일반투자'로 변경한 첫 주총이다. 업계는 국민연금이 이번 주총에서 저배당, 사외이사, 정관 변경 등에 의견을 내며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이어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네이버 등 국내 상장사 56곳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하는 내용을 공시했다. 이 명단에는 참여연대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이 올해 주총의 주요 타깃으로 삼은 삼성물산과 대림산업 등도 포함됐다.

#시장 최대 관심, 한진칼 경영권 분쟁

한편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한진칼 지분 약 2.9%를 보유하고 있어 이번 한진칼 주총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맡게 됐다. 한진칼 주총 의결권 기준 지분율은 조원태 회장 진영이 33.45%, 3자 주주연합이 31.98%를 각각 확보한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하 수탁위)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한 반대를 주총일 전날 밤에 확정지었다고 알려졌다. 또 한진칼의 경우에도 주총 이틀 전에야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의 재선임안을 찬성했다.

수탁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 전문위원회 산하 위원회로, 2018년 7월 말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면서 신설됐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와 책임투자 전략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위원회다. 국민연금 가입자단체(근로자·사용자·지역가입자)가 1명씩 추천으로 3명의 상근 전문위원과 외부 민간전문가 6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오는 3월 한진칼 주총안건 의결권 행사도 수탁자책임전문위가 결정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지난 6일 수탁위는 자본시장법령에 따라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보유목적이 경영참여로 공시된 점을 고려해 위탁운용사에 위임된 의결권을 회수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국민연금은 이번 주총의 경우 한진칼에 대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주주 제안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경영 참여형 주주권은 행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진칼 주총 전까지 물리적으로 검토할 시간 자체가 부족하고 경영계로부터 또다시 기업 경영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살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또 수탁위 내부에서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 등이 추천한 6명의 비상근 위원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일 것으로 전망돼 논의가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신 국민연금은 이달 한진칼 주총에서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 아니면 중립 등의 단순 의결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은 미디어SR에 “사회적 여론보다는 순수하게 한진칼 기업가치 중심으로 판단이 이뤄질 것”이라며 “회사 구성원과 노조 등 이해관계자의 의사와 경영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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