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영 디자인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정몽규

HDC그룹 회장. 그는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모빌리티그룹’으로 한 걸음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2조 5000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HDC그룹은 예상보다 큰 인수대금과 9조 원대에 이르는 아시아나항공의 부채 등으로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이 이토록 모빌리티 사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아버지인 故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연관이 깊다고 평가한다. 정몽규 회장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고교 시절부터 책갈피로 포니 자동차 사진을 끼워 넣고 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몽규 회장은 1962년생으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박영자씨의 장남이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현대자동차에 대리로 입사해 1996년 당시 34살의 세계 최연소 나이로 완성차업체(현대자동차)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세영‧정몽규 부자는 정주영 창업주의 말 한마디에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창업주 아들인 정몽구에게 넘겨야 했다. 그 대신 부자(父子)는 지금의 현대산업개발을 맡게 된다. 정몽규 회장은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 건설을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주변의 우려를 씻어내고 현대산업개발을 시공능력 평가에서 2019년 기준 9위에 오르는 종합건설사로 키웠다.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독자로 자라나 자립심이 강하고 현대자동차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경험 때문에 승부욕이 강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강한’ 외유내강형 인물로 평가받는다. 건설업계 최초로 품질관리를 위한 '라인스톱제'를 도입해서다. 라인스톱제는 자동차산업에 적용하는 제도로, 제조라인에서 불량제품이 발생하면 모든 공정을 멈추는 형태다. 건설공사에서 이러한 제도가 도입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경영시스템을 도입해 건설현장의 오랜 관행이었던 '한묶음' 방식의 자재투입을 자동차 부품처럼 낱개로 바꾸는 등 조용하고도 강력한 제도를 건설 현장에 적용했다.

예‧체능에도 관심이 많아 ‘팔색조’라 불린다.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홍익대 국제디자인대학원 디자인 혁신 전략과정을 듣기도 했으며 멋진 디자인의 건축물을 보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건물의 디자인을 중시하는 점은 사업전략에도 녹아들어 건설업계 최초로 건축물의 디자인을 중시하는 디자인경영을 도입하고 삼성동에 있는 ‘파크하얏트 서울’과 용산에 있는 ‘현대 아이파크몰’에 반영됐다고 한다.

정몽규 회장은 스키·산악자전거(MTB)·테니스 등을 즐겨 하며 과거 철인3종 경기에 도전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축구에 대한 애정도 넘친다. 대한축구협회(KFA) 회장직을 연임하고 있으며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국제축구연맹 평의회 위원이다.

 

故 정세영

정몽규 회장의 아버지.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자 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넷째 동생이다. 그의 별칭은 '포니(PONY) 정', 포니는 정세영이 1974년 만들어낸 한국 최초의 고유 브랜드 자동차다. 그는 ‘포니’로 1976년 수출에 나섰고 한국 자동차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비행기’로나마 이어가겠다는 것이 정몽규 회장의 뜻이 아닌가 재계는 관측하고 있다.

정세영은 보성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정치외교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일을 하던 정세영은 '큰형님' 정주영 창업주의 지시로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한국 고유의 자동차를 만들고 또 산업을 발전시켜라"라는 특명을 받은 그는 1967년 미국 포드사와의 합작을 이끌어 내더니 1974년 한국 최초의 독자 생산 모델 '포니'를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 자동차 전용 공장을 만든 것은 물론 국내 최초로 자동차 종합 주행장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엑셀, 쏘나타, 그랜저, 엑센트 등을 개발·출시해 차량 라인업을 다양화하면서 32년 동안 한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써 나갔다.

그러나 1999년 현대차 경영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창업주 정주영은 동생인 정세영에게 자동차에서 손을 떼라고 통보했다. 현대차를 아들 정몽구에게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형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정 명예회장은 한마디 반박도 하지않고 아들 정몽규 회장과 함께 낯선 건설 분야인 현대산업개발로 넘어갔다. 정세영은 당시 경영권을 넘긴 것이 자신의 뜻이라 밝혔지만 이 사실이 억울하고 또 슬펐는지 회장 이임익에서 사가(회사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린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자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차남. 정몽규 회장과는 사촌지간이다. 정몽구와 정몽규 회장 간에는 앙금이 남았을 수 있는데, 정세영‧정몽규 부자가 창업주 정주영에 순응한 것이 무색하게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다시 벌어졌기 때문이다. 정몽구와 동생인 정몽헌이 그룹 패권을 놓고 다투면서 현대그룹에서 현대자동차 등 10개 기업으로 구성된 현대자동차그룹이 독립하게 된다.

뚝심경영과 현장경영, 품질경영으로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5위 완성차회사로 키운 경영성과를 널리 인정받는다. 최고 전문가를 영입해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출범시키면서 글로벌 완성차기업들과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책임경영과 연구개발을 강조해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 받는다. 자율주행을 비롯한 미래 핵심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모빌리티를 넘어선 혁신이 가능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평가다.

정몽구는 1938년 3월19일 강원도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경복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과(현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건설에 입사해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장,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 현대산업개발 사장, 인천제철 사장, 현대중장비산업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형인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범현대가에서 사실상 맏이 역할을 맡아왔지만 최근 회장직은 유지하면서도 그룹 경영에서는 물러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철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HDC그룹의 대표적인 재무와 기획 전문가다. 사실상 이번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을 총괄하며 전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정몽규 회장은 지난해 11월 기자간담회에서 몇몇 임원들을 ‘아시아나항공 딜을 성공시킨 주역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김대철도 함께 지목했다. 박현주와 함께 김대철은 정몽규 회장의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년 선배이기도 하다(김대철 77학번, 정몽규 80학번).

1958년 11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현대자동차 국제금융팀장, 현대산업개발 기획실장, 기획본부장을 거쳐 아이콘트롤스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바 있다. HDC자산운용과 현대산업개발 모두 대표이사 사장을 거쳤고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가 2020년 1월 1일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대철은 30년 가까이 범현대가에서 기업경영을 도맡아온 ‘재무통’인 만큼 아시아나항공 인수 뒤 재무 건전성을 높일 ‘키 맨(key man)’으로 꼽힌다. 정몽규 회장은 김대철이 1991년 현대자동차 국제금융부장이던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현대자동차가 1999년 정몽구 회장에게 넘어갔을 때도 김대철은 빼앗기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으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자본시장의 개척자’이자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으로 꼽힌다. 정몽규 회장과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2년 선후배 사이다(정몽규 회장 80학번, 박현주 회장 78학번).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컨소시엄을 꾸려 함께 뛰어들었다. 미래에셋은 4900억원을, HDC현대산업개발은 2조 5000억원 가량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둘은 부동산114 매각과 인수 등으로 일찌감치 사업에 기반한 신뢰 관계도 다진 상태였다.

1958년 광주에서 태어난 박현주는 1986년 동양증권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 코스를 밟았다. 3억 원 규모의 법인 주문을 따내는 성과를 인정받아 45일 만에 대리로 승진, 1년 1개월 만에 과장으로 승진했고 1991년 동원증권 중앙지점 지점장을 거쳐 1996년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이사로 승진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창업한 후 6년 차에 2001년 미래에셋그룹 회장에 올랐다. 2018년 5월에는 미래에셋대우 회장에서 물러나 글로벌 경영전략고문(GISO)으로서 해외에 더 많이 머무르면서 글로벌사업 확장 및 투자기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현주의 총자산은 1조 2650억 원으로 2013년 ‘1조 클럽’ 자수성가형 6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2009년 그의 미래에셋 성장 스토리가 하버드비즈니스스쿨 MBA의 ‘국제 기업가정신’ 강의교재로 채택됐다. 승부사적 기질과 동물적 투자감각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 박현주는 미래에셋그룹을 아시아 1위의 금융투자회사로 키워 모건스탠리·메릴린치·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포부를 자서전에 밝힌 바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이자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동생. 국내외에서 면세점사업 확대를 넘어 호텔사업에서도 해외진출을 통해 글로벌 호텔 체인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범삼성가로서는 처음으로 범현대가인 정몽규 회장과 손을 잡고 HDC신라면세점을 출범시켰다. 삼성과 현대가 전통적인 재계 라이벌 관계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정몽규회장과 이부진 사장이 강한 승부사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부진은 2001년부터 호텔신라에서 근무하다가 2010년 말 호텔신라 단독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3남매 중 가장 먼저 등기임원에 선임됐을 뿐 아니라 대표이사를 맡아 경영을 총책임하는 자리를 맡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과 경영 스타일이 이건희 회장과 가장 닮아 ‘리틀 이건희’라 불린다. 냉철하고 경영수완도 뛰어나 이건희 회장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HDC신라면세점이 개장 3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고 서울 시내 신규 면세점 중 처음으로 에르메스·샤넬과 함께 3대 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를 유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경영수완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부진은 최근 5년 3개월 만에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과의 이혼소송을 끝냈다. 이부진이 자녀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갖고 임우재는 재산분할액 141억원을 받게 된다. 이로써 1999년 8월 삼성재벌가와 일반 사원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던 이 결혼은 21년 만에 파경을 공식화했다.

 

차범근

‘차붐’. 한국 축구의 전설이자 전 국가대표팀 감독, MBC‧SBS 축구 해설위원을 지냈다. 정몽규 회장과는 차범근이 울산현대 축구단 감독을 맡던 시절 울산 현대 사택에 살면서 인연을 맺었다. 2016년 차범근은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제의를 수락하면서 축구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그동안 정몽규 회장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한국 축구를 위해 거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정몽규 회장님에게 늘 고마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차범근은 1972년부터 국가대표 공격수로 활약하며 A매치 최다출전(136경기) 과 최다골(58골)을 기록했으며 1978년 한국 축구선수 최초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 10시즌동안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폭발적인 플레이로 ‘갈색폭격기’, ‘차붐’이라는 애칭을 얻었으며 수많은 축구선수들과 독일인들이 ‘차붐’을 기억하고 있다. 2002년 슈뢰더 총리가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차범근은 은퇴 후 1991년 현대 울산 감독을 시작으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 대표, 2004년 수원 삼성 감독 등을 거치며 K리그 우승(2004, 2008)과 FA컵(2009)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1998년 차범근 축구상 제정, 1990년 차범근 축구교실 설립 등 유소년 축구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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