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미디어SR 김예슬 기자] 

‘백두산’을 통해 다양한 시도에 나선 배우 이병헌은 유독 이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의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이 더해진 이번 작업은 이병헌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국영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마주한 그는 배우로서의 고민을 멈추지 않고, 다음의 ‘새로움’을 마주할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Q. ‘백두산’은 압도적인 CG가 인상적이었어요.
이병헌:
이 영화는 반 이상이 CG여서 시사회 전까지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어요. 영화를 직접 봐 보니 그 규모에 놀랐죠. 연기할 땐 상상만 하던 것들을 완성된 모습으로 보니까, 그림이 입혀지고 안 입혀지는 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했던 감정 연기와 대사를 기억하며 영화를 보기 때문에 시사회 때 온전히 관객의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가 힘든데, 이번 작품은 배경이 상상되지 않으니 관객 입장으로 즐기며 볼 수 있었어요. 특히, 영화 초반에 강남역 빌딩이 무너지고 지진이 나면서 영화가 힘 있게 시작돼 좋았어요.

Q. 영화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요?
이병헌:
볼거리가 많은 재난영화라는 점이에요. 보통의 재난영화는 개개인들의 관련 없는 삶의 모습이 나오고 재난이 시작돼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는 재난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지만 버디무비의 재미가 가득한 영화라 생각했어요. 그 지점이 제겐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Q. 하정우와의 출연이 기대감을 주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이병헌:
당연히요. 하정우 씨가 이전 영화에서 보여준 것들도 그렇고, 평상시에 그 배우가 가진 센스와 재치들이 충분히 이 영화에 활용됐다고 생각해요. 재미있을 것 같았죠.

Q. ‘백두산’ 속 캐릭터들은 기존 작품들의 정형적인 모습과는 달라요. 특히나 극 중 이중스파이 리준평과 군인 조인창은 그 직업군이 가진 클리셰와는 완전히 다른 톤이었죠.
이병헌:
합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한 부분이 있어요. 서로가 각자 연기세계를 갖고 있고 자신이 생각한 작품 색과 캐릭터 구축이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합이 맞아떨어졌어요. 리준평은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전라도 사투리도 썼다가 러시아어, 중국어도 쓰는 사람이에요. 그런 부분들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이중스파이로서 살아온 이 사람의 언어 능력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했어요.

Q. 영화 ‘마스터’에서 필리핀식 영어를 썼던 게 인상 깊었는데 이번 작품에선 자연스러운 북한 사투리를 구사했어요. 캐릭터에 맞게 언어를 치환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나요?
이병헌:
보통 작품을 만나면 캐릭터에 필요한 것들을 다시 공부하거나 선생님을 만나 레슨을 받곤 해요. 이 영화에선 네 가지의 익숙지 않은 언어를 연습해야 했죠. 다 같은 한국말이지만 목포 사투리와 북한 사투리, 중국어, 러시아어를 따로 배웠는데, 외국어는 촬영 전 녹음해둔 걸 계속 들었고 목포와 북한 사투리는 선생님이 현장에 계속 함께 해주셨어요. 북한 사투리에 가장 부담 느꼈지만 정작 가장 힘들었던 건 중국어였어요. 연습을 계속 했죠.

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Q. 한 아이의 아빠로 나오며 부성애를 연기했어요. 아역과의 조합도 좋았죠.
이병헌:
순옥이로 나왔던 친구가 연기를 정말 잘해서 깜짝 놀랐어요. 아역과의 장면이 사실은 더 길었는데, 감정을 누르는 게 아니라 굉장히 감정 폭발을 겪는 장면이었어요. 모든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다 울 정도였죠. 아역으로 나온 친구가 대사 한 마디도 없이 눈빛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걸 정말 센스 있게 잘 해냈어요. 촬영이 끝나고 어머니에게 가서 이 친구는 정말 훌륭한 배우가 될 거라고 말해줬죠. 하지만 나중에 감독님이 편집과정에서 이 장면들이 너무 강하니까 밸런스 부분에서 많이 편집을 해야겠다고 해서 굉장히 많이 솎아냈어요. 오열까지 다다르는 과정들이 보였으면 그 친구가 정말 좋아했을 텐데 싶어요.

Q. 다만 그 장면에 대해 전형적인 한국영화 신파라는 평과 감정선의 흐름이 좋다는 양극단의 반응이 나왔어요.
이병헌:
이 영화는 재난 장르의 오락영화라 생각해요. 연말 같은 시기에 많은 관객들과 만나는 게 오락영화라면, 이 재난영화에서 보여준 스케일과 재미 그리고 웃음과 신파와 눈물 등 무엇이 됐든 간에 여러 가지 충분한 조건들이 작품에 다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어떻게 보면 모든 게 다 클리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종류의 영화가 따로 더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Q. 전도연과의 호흡도 잠깐이지만 관객 뇌리에 깊게 남았죠.
이병헌: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어요. 하지만 이전에 여러 작품을 같이 해봤기 때문에 워낙 익숙한 상대예요. 정말 어렵고 중요한 장면이었지만 순조롭게 촬영했어요. 서로에 익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같은 게 없었거든요.

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Q. 재난영화인 만큼 달리는 버스나 흔들리는 땅에서의 액션을 소화하는 데에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병헌:
그동안은 연기를 할 때 지진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백두산’은 천재지변을 겪는 영화여서, 지진이 일어날 때의 움직임을 감독님과 항상 상의해야 했죠. 예를 들어 버스 안에 있다가 흔들림이 있을 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한 쪽으로 쓰러져야 했으니까요. 그 타이밍이 정말 중요한데, 그런 걸 맞추는 것들이 쉽지 않았어요.

Q. CG로 입혀질 배경의 규모감을 생각하고 연기하는 것도 어려운 부분 중 하나였겠네요.
이병헌:
주변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감독님과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래야 상황의 크기에 맞는 리액션을 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뒤의 배경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배우의 액션이 맞지 않으면 정말 어색하잖아요. 리액션의 크기를 잘 생각해야 했는데, 그렇기에 감독님과의 대화가 더더욱 중요했죠. 현장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어도 스크린으로 직접 보니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Q. 자타가 공인하는 ‘연기 잘하는 배우’로 통해요. 하지만 연기만큼 정답이 없는 영역은 드물죠. 연기에 대해 어떤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을까요?
이병헌:
늘 고민하고 있죠. 그 고민은 계속 되지 않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아무리 잘 나온다 할지라도 그 고민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연기라는 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잠깐 사는 건데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고 공식이 어디 있겠어요. 계속 궁금해 하고 또 생각하고 연구하며 계속 깨달아가는 거죠.

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Q. 그런 고민의 산물이 독특한 리준평 캐릭터를 완성시킨 것 같아요. 유머 코드를 가진 캐릭터지만 리준평이 등장하면서 영화의 무게가 잡힌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죠.
이병헌:
그건 의도된 것이었어요. 리준평의 등장 신 자체가 EOD 대원들이 뒤로 훅 물러날 만큼 놀라게 하잖아요. 그걸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게 하려 했죠. 그러다 첫 마디가 목포 사투리고 곧이어 러시아 말을 하는, 종잡을 수 없으면서도 웃기고 무섭기도 한, 정말 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요. 상대를 현혹시키면서도 ‘저 사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 하고자 했거든요. 그게 리준평 등장에서 목표했던 바예요.

Q. 캐릭터를 구현하기까지의 고민 과정이 길었을 것 같은데.
이병헌:
프로페셔널하게 임했죠(웃음). 집중할 수 있도록 계속 발버둥을 치는 것뿐이에요. 촬영장에서, 그 상황 속 어떤 감정 상태로 있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죠.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의 감정이란 게 딱 맞춰지겠어요.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감정 상태로 계속 있기 위해 애를 쓰는 거예요. 감정을 유지한다는 게 사실 정말 힘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거죠. 특히나 촬영 중간에 쉬어가는 타임이 있을 때면 감정 유지가 안 되는데, 그럴 때면 아까 찍어둔 걸 모니터로 보고 ‘내가 이 정도의 감정이었고 내가 어떤 상태에 빠졌으니 그런 감정이겠다’는 걸 유념하며 그 정도의 수위를 유지하려 해요. 톤이 튀어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계속 발버둥을 치는 거고.

Q. 고된 노력의 연속인 작업 과정에서도 가장 설레고 좋은 건 무엇인가요.
이병헌:
매일 촬영한다는 전제 하에 그날 촬영의 한 커트, 한 신에서 내가 진심으로 연기한 그 감정상태가 너무 좋으면 그게 그날 하루의 내 감정을 모두 지배해버리는 것 같아요. 반대로, 촬영했는데 그 감정이 진심으로 도저히 안 나와서 결과적으로 흉내만 낸 것 같을 때면 그날 하루의 기분이 계속 안 좋아요. 그냥, 연기가 그날 하루를 다 지배해버리는 거죠. 배우들은 다 그런 것 같아요.

배우 이병헌. 사진. BH엔터테인먼트

Q.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하면 할리우드에서 선보이는 작품의 텀이 조금 길어진 것 같아요.
이병헌:
기본적으로 스케줄 조율이 정말 힘든 편이에요. 이상적인 활동이라면 여기서 한두 작품 찍고 미국에서 작품을 찍는 식이 좋겠지만, 모든 건 타이밍이거든요. 한국에서 몇 년간 찍고 할리우드 작품 촬영을 위해 일부러 작품을 안 잡고 기다리다 없나보다 싶어 한국에서 작품 출연을 결정하면 며칠 후에 미국 에이전트에게 전화가 온다는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정말 운인 거죠.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의 몇몇 배우들은 아예 자국 영화 일정을 멈추고 미국에서 체류하며 미팅을 하고 작품을 찍기도 한다는데, 그런 게 점점 많아지고 있다더라고요.

Q. 마찬가지로 그런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병헌:
미래에 대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제겐 한국영화도 그만큼 중요하거든요. 지금의 한국영화가 주는 파급력도 만만치 않다고 봐요. 한국영화는 이제 전 아시아와 북미, 남미에서도 봐요. 한국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의 파급력이나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에서 좋은 작품을 하는 게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외국말과 외국영화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면, 우리말과 우리 문화로 할 수 있는 영역에는 더 자신이 있거든요.

Q. 한국영화에 있어 올해는 정말 뜻 깊은 해예요. 요즘의 한국영화가 가진 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이병헌:
부정적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여전히 한국영화의 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이전에 ‘지 아이 조2’를 찍을 때부터 해외 스태프들에게 한국영화는 다음 장면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 예측불허의 매력과 특별함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어요. 최근에도 미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죠. 특히나 이번에 ‘기생충’이 한국영화의 위상을 엄청나게 살려줬다는 느낌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Q.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어요. 앞으로는 어떤 배우를 꿈꾸고 있나요.
이병헌:
자꾸만 기대되는 배우요. 새롭게 작품을 시작할 때 계속 기대를 받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사실 그런 배우로 계속 남는다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렇게 되고 싶은 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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