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장혜진 시인

[장혜진 시인]

어제와 오늘 하늘이 뿌옇게  흐려있다.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골이 이정도라면 도시는 또 얼마나 더 뿌연 하늘일지 걱정이다. 도시에 나가있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흐린 하늘을 보다가 내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다.
희뿌연 , 그것이 나쁜  미세먼지라 해도 순간 먼 시간속 그리움을 불러내는 .....

내 어릴적 겨울은 뿌연, 아니 뽀얀 안개같은 수증기로 시작되었다.
겨울이 시작되면 지하실의 연탄화덕 위에 커다란 솥이 올려져 있었고 반쯤 열린 솥 뚜껑 사이로 쉴새없이 새어나오던 뽀얀 수증기가 그렇게 신기해보일 수 없었다.
할머니께서 가끔 뚜껑을 열어보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실 적마다 따라 내려갔었다.
솥뚜껑을 열었을 때 할머니의 얼굴이 순간 사라지는 그 마술을 놓치지 않으려고 내려오지 못하게 해도 굳이 따라나섰다.

솥뚜껑을 열어 젖히면 뽀얀 수증기가 마구마구 밖으로 퍼져 나왔다. 마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솥단지 안에 갇혀있던 몸집 커다란 요술쟁이가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상상을하며 솥단지 근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뽀얀 수증기, 그때 내게는 그것이 안개였고 하늘에서 내려온 흰 구름이었고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내 부름을 받고 솥에서 빠져나온 요술쟁이 지니였다.

그때 내가 살던집은 3층으로 지어진 단독주택이었다.
할머니께서 직접 설계해서 지은 집이라 지하실에 따로 연탄화덕을 만들었다. 이유는 곰국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막 시작되면  소뼈와 고깃덩이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커다란 함지박에 담아 핏물을 뺐는데 나는 그 핏물을 한번 본 후 그 뼈와 고깃덩이가 솥으로 들어가 고아지기 시작전 까지 할머니를 따라서 지하실로 내려가지 않았다.
늘 상 그림자처럼 할머니뒤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붉게 우러난 핏물이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마구 토하면서 울었던 기억, 지금도 붉은 피를 보면 헛구역질을 한다.

그해 겨울도 예외없이 지하실의 솥단지 안에서 소뼈가 고아지고 있었다. 한낮에 뚜껑을 열어 젖혔을때는 크게 재미가 덜했다. 수증기가 눈앞을 완전히 가려도 주변이 밝기 때문에 신비로움이 덜해서 감동이 떨어지지만 밤에는 다르다.
아무리 지하실의 전등이 켜 있어도 밤은 밤이기에 솥단지를 빠져나오는 요술쟁이 지니의 그 황홀한 광경을 지켜보는 일이란 아, 숨이 탁 멎을 것 만 같았다.
눈앞에 모든 사물이 일순간 사라지고 내 작은 세상이 뽀얗게 변하는 그 찰라 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할머니께서 솥단지를 내려놓다가 그만 기울어져서 그 펄펄 끓던 곰국이 가까이 서 있던 내 발등위로 다 쏟아졌던 것이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갔던 기억과 그해 겨울은 곰국을 먹지 못했다.
그 다음해는 곰국을 다시 먹게 되었지만 지하실 출입을 금지당했다. 곰국에 데인 발등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서 한여름에도 맨발을 내놓지 못하고 양말을 신고다녔다.
십년 가까이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나는 지금도 곰국을 좋아한다.
곰국을 먹을 때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희붐한 수증기, 내게는 안개같은 그리움이기에.....
그리고 그때는 곰국이 곰의 뼈로 끓이는 줄 알았다.
곰의 어느 부위냐고 물었더니 곰의 다리라고 했다.
세상 모든 할머니들은 가끔 거짓말을 한다.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었는데 어떤 거짓말을 해볼까 궁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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