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미디어SR 김병헌 전문위원]

영웅은 속도에 승부를 걸었다

삼십육계(三十六計), 중국의 병법서다. 전술 36개를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모았다. ▲승전계 ▲적전계 ▲공전계 ▲혼전계 ▲병전계 ▲패전계 등 6줄기에서 각각 6개의 계책이 제시된다.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5세기까지 고사(故事)를 17세기 명(明)말 청(靑)초에 수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6 줄기중 마지막인 패전계(敗戰計) 말미 제36계가 지금도 가장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주위상계(走爲上計).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전략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인 도주(逃走)의 의미보다는 속도(速度)의 의미가 강하다. 다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군사전력에서 속도의 가치는 크다. 13세기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 원(元)나라의 역사가 증명해준다.원 태조(太祖) 징기즈칸이 대제국을 완성한 기간만 봐도 확인된다.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칸의 사망연도는 1227년. 대외 정복에 나선 시기는 21년이다. 당시 제국의 영토는 동유럽에서 아시아 대륙 끝까지 18개 국가를 관통하고 있다.

마지막 36계는 최후 수단으로 알려져있다. 징기스칸은 36계를 역으로 으뜸인 1계로 삼았다. 장기전이나 역간의 불리한 기미가 보이면 바람처럼 우회하거나 비켜갔다. 이게 36계다. 탁월한 전쟁감각과 리더십까지 감안해도 18개국에 걸친 대제국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의 병사는 1명당 보통 말을 3마리 이상 데리고 전장에 나섰다. 가능했던게 속도 때문이다. 타고가던 말이 지치면 다른말로 옮겨 타고 달린다. 칭기즈칸이 관심을 두었던 것이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애기도 있다. 애초 북중국과 서요(西遼)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다고 한다. 서쪽의 호라즘 왕국과는 교류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 직접 길을 트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학설도 있다. 실제 칭기즈칸의 정복 여정을 보면 보면 지배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원정은 대부분 재정 충당이 목적이었다. 요즘 글로벌 기업과 다를바 없었다.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은 징기즈칸이 죽은 뒤의 일이다.

셀러리맨의 신화...킴기스칸

지난 9일 별세한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당시 사람들은 '킴기즈칸’이라 불렀다. 뭐가 칭기즈칸처럼 느끼게 했을까. 바람처럼 나타나 속전속결로 세계를 휩쓰는 무서운 속도였다. 실제 그랬다. 김우중은 칭기즈칸처럼 세계를 누비며 세상을 바꿔나갔다.그는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세운다. 무역 위주의 사업 확장으로 당시 한국의 주 생산품목이던 섬유·의류 등을 수출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증권·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에 발맞춰 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추가하면서 그룹의 외연을 넓혔다.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단 10여년 만에 곧장 현대그룹·삼성그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만든 대우전자는 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해 금성(현 LG)·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아울러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설립한 대우자동차는 중동에서 구 소련, 아프리카까지 전세계에 팔리는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으로 우뚝 섰다.

지금 50대 이상인 당시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불렀다. 거칠 것 없는 김우중에 세계도 놀라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소련 붕괴는 그에게 본격적인 세계 경영의 무대를 열어준다 한국기업으론 독보적으로 동유럽,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에 잇따라 진출했다. 89년 펴낸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샐러리맨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180만부가 팔렸다. 출간과 함께 당시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려 최단기 ‘밀리언 셀러’ 기네스 기록도 세웠다. 93년엔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그룹의 모체인 무역업은 물론 자동차와 중공업 수출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세계경영’을 경영교과서로 채택해야 한다는 애기가 나올 정도였고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등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로 유명했다. 1년 중 3분의2를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해외 진출에 공을 들였다. 다른 재벌 창업자들과 달리 전문경영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해결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사분규로 대우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1년 반 동안 옥포 조선소에 머물며 현장경영을 지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룬 대우의 극적인 성장사에는 일반인이 체감하기 어려운 초음속의 스피드가 느껴진다.

그가 세계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모든 역량을 해외 시장에 집중했다.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폴란드 까지 그의 세계경영은 끝을 몰랐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대한 투자가 결실을 맺으면서 세계경영의 영토는 호가장일로를 더한다. 중국, 몽골, 인도, 루마니아, 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루트도 완성됐다. 사실 ‘킴기즈칸’이라는 별명도 1996년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공장 준공식 때 우즈베키스탄 카리모프 대통령이 칭기즈칸에 비유하며 붙여준 별명이다.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

속도경영도 공격경영도 세계경영도 외환 위기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부채 규모가 눈더미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공격경영으로 맞섰지만 자금난과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99년 그룹은 해체됐다. 98년 당시 자산총액은 76조 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이었다. 그룹 해체 전까지 41개 계열사와 21개 국가에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보유하고 국내서 10만명, 해외서 25만명의 직원을 두었다. 60년대 말 압축성장 시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해 세계를 뒤흔들던 그는 이제 영면에 들었다. 그가 만든 기업들이 주인만 바뀌었을 뿐 상당수 아직 건재하다. 그가 경영현장을 떠난지 벌써 20년. 인구에 회자되던 ‘세계경영’도 그의 명성도 사라진지 오래다. 경영일선을 떠난후 생전에도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경영방식에서 정말 배울 것이 없는 것일까. 구시대의 인물로 생각하는걸까.

그는 갔지만 우리 기업사의 한 획을 그은 그는 분명 영웅이었다. 이제 역사적 평가까지 더 이상 초라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도전적인 기업가정신은 지금 경영인들은 배워야 한다. 시대를 앞서간 재계의 큰 별이었기에 그에게서 배울 점은 그 외도 많다. 기업경영에 있어 방식과 양태는 변했을지 모르나 근본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를 강조했다. "옛 것을 복습하여 새로운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능히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는 온고지신이 다름 아니다. 고인이 쓴 책의 일독도 아울러 권한다. 지금 세계는 30~40년전 보다 훨씬 더 넓다. 할일도 정말 많고 넘치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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