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의 빛과 그림자
능력주의의 빛과 그림자
  • 이영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19.11.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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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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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득분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능력주의(meritocracy)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이 아니라 재능, 노력 또는 업적에 의거해 경제적 자원이 개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에 상응하는 경제이론이 한계생산성이론(marginal productivity theory)인데, 이는 생산과정에서 ‘추가적’으로 기여한 정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는 원칙이다. 예컨대 축구팀에서 슈퍼스타를 영입해 구단의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면 그 선수의 한계생산성이 매우 높았기에 고액의 연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에서 각자에게 귀속되는 소득이 결정되는 방법으로 무엇이 바람직한지 생각해보자.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했던 구소련이나 동구에서 공산당 간부로서 행정부, 산업 및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한 가운데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던 계층은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고 불렸다. 이들은 폐쇄적인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확장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기에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앞당긴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현재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는 소수의 특권층은 엄청난 혜택에 대한 반대급부로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이다. 이 모두 능력주의와는 극단적으로 배치된다. 이보다는 능력주의가 훨씬 더 공정할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의 효율을 높이는 원칙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필자는 1776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데는 능력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도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존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그리고 존 피어몬트 모건 등 이른바 강도남작들(robber barons)이 산업을 독과점화하면서 무자비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시절은 능력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능력주의 전통이 굳건하게 유지됨으로써 강력한 미국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 이런 미국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필자가 굳이 미국을 거론하는 이유는 미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의 미래에 대비하자는 의도에서다. 미국에서 능력주의가 퇴조를 보이게 된 배경으로는 금융자본의 지배, 슈퍼경영자의 등장 그리고 IT기업의 성장에 따른 슈퍼리치의 부상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된 이후 1999년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글래스-스티걸법’이 완전히 폐기되면서 금융자본은 메인스트리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시장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찰스 퍼거슨(Charles Ferguson)이 제작·감독한 다큐멘터리 필름 《Inside Job》에 잘 묘사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금융자본은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는 이른바 단기주의(short-termism)를 바탕으로 전문경영자들에게 엄청난 보수를 당근으로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슈퍼경영자의 등장을 촉진했다. 20세기 ‘경영의 신’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Jack Welch)는 그런 슈퍼경영자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특별히 재능이나 통찰 때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단기 이익에 충실한 대가로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게 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와 관련해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가 기업의 성과와 전문경영자의 능력 간에는 뚜렷한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21세기 자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카너먼 교수와 같은 입장에서 전문경영자의 높은 보수를 능력주의 내지 한계생산성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경영진의 급여가 한계생산성으로 결정된다면, 기업 성과의 변화는 외부적 요인과 거의 관련이 없어야 하고 오로지 혹은 주로 비외부적 요인에 좌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경영진의 급여가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들로 매출과 이익이 증가할 때다.”

그러면서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영미권 국가들이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대폭 인하한 것이 최고경영진들이 높은 급여 인상을 추구할 강한 유인(誘因)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슈퍼경영자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능력주의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지대추구행위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도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장관을 역임했고, 《타임》지에 의해 20세기 미국의 10대 관료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현재 버클리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교수는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능력주의 는 허구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급여가 자기 ‘가치’를 결정한다는 개념이 대중의 인식에 매우 깊이 박혀 있어서 흔히들 소득이 매우 적은 것은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머리가 좋지 않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등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해 수치를 느낀다.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특별히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한계생산성이론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급여가 높으면 곧 능력이 있고 한계생산성이 높은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논리의 역전이다. 생산성이 높은 사람이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관습과 제도적 요인으로 인해 높은 급여를 받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능력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라이시 교수는 이로 인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자원이 낭비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급여가 자기 가치를 반영한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이라면 지난 30년간 일반 근로자와 비교해 미국 대기업 전문경영자의 급여가 치솟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집단이 받는 급여의 비율은 1965년 20 대 1에서 1978년 30 대 1, 1995년 123 대 1, 2013년 296 대 1로 해마다 벌어졌다. 전반적으로 전문경영자의 급여는 1978년부터 2013년까지 937% 상승했지만, 일반 근로자는 10.2% 증가했을 뿐이다. 이것은 능력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이 2013년 보너스로 267억 달러를 받은 이유는 일반 미국인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기 때문도, 더 똑똑하거나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보니 그들은 미국 정치경제에서 특권을 쥐고 있는 기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받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사례들은 모두 미국에서 능력주의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제대로만 실행된다면 능력주의는 바람직한 원칙이다. 이 점은 앞서 언급했던 공산주의 체제에서 특권층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원래의 의미 그대로 실행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능력을 지나치게 보상해주는 ‘승자독식’의 정보기술 시대에서는 특히 이 점이 두드러진다.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와 기업은 쉽게 금권정치(plutocracy)로 기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종 법과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이 사실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기에 점점 더 금권정치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저널리스트/작가 출신으로서 캐나다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현재 부수상으로 재직하고 있는 크리스티아 프리랜드(Chrystia Freeland)의 《The Rise of the New Global Super-Rich》라는 제목의 TED 동영상을 추천하고 싶다. 이 동영상에서 프리랜드는 글로벌 IT기업들의 부상으로 인해서 점점 더 금권정치가 강화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미국은 새로운 뉴딜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 입장에서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제대로 실행하기 어려우니 폐기하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능력주의 외에 다른 분배 원칙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원칙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른 경우에나 가능한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핵심은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함으로써 공평과 효율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번영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동시에 사회발전이 개인의 번영을 촉진하는 상보적인 관계를 공공히 하려면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공정하고 절제된 능력주의를 주장한다. 세계적인 투자 귀재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는 미국의 워렌 버핏은 자신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만약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버핏은 빌 게이츠와 함께 2010년 《The Giving Pledge》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부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할 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자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의 취지에 동참하는 억만장자들이 계속 늘어나 2019년 현재 세계 22개국에서 204명이 개인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이 보유한 재산 총액은 대략 1조 달러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5,000억 달러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것이다. 이들은 에고의 관점이 아닌 모두의 관점에서 능력주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능력주의에도 양면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사회가 존재하므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축적한 부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분명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해온 능력주의와는 다른 측면이다. 필자는 이런 높은 의식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능력주의를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누진적 소득세 및 재산세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분야를 지원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계몽된 능력주의를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  
 

이영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ylee11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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