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진의 세상 풍경]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다
[장혜진의 세상 풍경]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다
  • 장혜진 시인
  • 승인 2019.11.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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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 장혜진 시인

[장혜진 시인]

고깔모자를 쓴 목각인형이 귀뚜라미에게 말했다.
너는 왜 가만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나를 성가시게  하는거지?

목각인형의 머리위를 막 지나가며 앞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던 귀뚜라미가 대답했다.
밤 낮 계속 혼자 서있는 네게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내가 친구해주면 캄캄한 밤 혼자 서 있어도 무섭지 않을 것 같지 않니?
목각인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것봐! 성가신 귀뚜라미? 네가 가을이면 찾아와서 불러대는 그 엉터리 노래에 내 귀가 뚫어질 것 같다구!  어떤날은 네 노랫소리가 오른쪽귀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나올 지경이야! 알아?
목각인형의 화에 날개를 바삐 비벼대던 귀뚜라미가 깜짝 놀라 목각인형이 짊어지고 있던 물통속으로 쏙 들어갔다.

풀이 죽은 귀뚜라미는 물통속에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노래를 듣기는 들었구나?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싶었어...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노래를 불러주는 것 밖에 없지만,아 또 있다! 내가 네 머리위에서 노래를 불러주기 위해 날개를 비벼댈 때, 네 모자위에 쌓인 뽀얀 먼지를 쓸어 줄 수 도 있었어...

귀뚜라미는 종달새마냥 종알거리며 다시 날개를 세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때 목각인형은 한번도 직접 본적은 없지만 지금 순간 은방울꽃이 또르르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티 브이에서 보았던 희고 앙징맞은 작은 종모양의 꽃이 떠올려졌다.

화를 멈추고 자신의 노랫소리에 귀를 귀우리는 것을 눈치 챈 귀뚜라미가 한껏 들떠서 목각인형의 모자위로 폴짝 올라가 앉았다.
그런 귀뚜라미를 보기위해 눈을 위로 치켜 뜨며 목각인형이 힘없이 말했다.

애쓰지마. 내 심장은 나무로 되 있어, 네가 아무리 애써 노래를 불러도 기쁨에 들떠서 쿵쿵 뛸 수 없는 심장이야...
내 운명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감동이 없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
목각인형은 치켜 뜬 눈을 아래로 내리더니 아예 감아버렸다.

그때 모자위에서 단박에 뛰어내려온 귀뚜라미가 목각인형의 감겨진 눈까플을 두발로 벌려서 뜨게하며 소리질렀다.
눈떠! 눈떠봐! 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였어! 지금 이 순간 넌 다 느끼고 있었던 거야! 감동이 없는 운명이라 말하는 그 순간 감동이 시작된거라구!

귀뚜라미의 호들갑에 눈을 크게 뜬 목각인형이 귀뚜라미를 바라봤다.
들뜬 귀뚜라미는 더 세게 바삐 날개를 비비며 은방울꽃송이를 목각인형에게 뿌려주며 말했다.

내 노랫소리가 오른쪽 귀로 들어가서 왼쪽귀로 나온다고 했잖아? 그게 바로 감동의 시작이었어.넌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였어. 그리고 너는 내게 많은 걸 내어줬지. 네 모자위를 내주고 내 아늑한 잠자리가 되어주는 물통도 주고 참 많은 걸 주었잖아.....네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야. 너는 내게 참 친절한 친구란다.친구야....

귀뚜라미의 말에 한번도 스스로 움직여보지 않았던 목각인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깨위에 앉아있는 귀뚜라미를 내려다 보았다.
작고 앙징맞은 흰 은방울 꽃송이가 때늦게 피어 떨어지고 있었다.


장혜진 시인 jmo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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