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픽사베이

[이영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우리 주변에 널리 침투해있으며 이 추세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10년 후에는 의료, 소매, 통신, 금융, 제조 등 거의 모든 비즈니스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권위 있는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MGI)>의 보고서 <The Promise and Challenge of the age of AI>에 의하면 인공지능 기술을 채택하지 않는 기업들은 조만간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현재 많은 기업들이 구체적으로 비즈니스에 인공지능을 접목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비즈니스 영역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우월한 알고리즘과 이를 운영할 인력을 확보한 기업들, 예컨대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은 여러 분야에서 선두주자의 입지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전방위적 영향력과 관련해 여러 연구소들은 2030년까지 인공지능이 글로벌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를 예측하고 있는데 대체로 큰 편차는 없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이 앞서 언급한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의 보고서다. 이에 의하면 2030년까지 인공지능은 글로벌 차원에서 약 13조 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때까지 연평균 GDP 성장률 1.2%를 유발하는 효과라고 한다. 1800년대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0.3% 향상되었으며, 1990년대 로봇을 이용한 자동화의 영향으로 0.4%, 그리고 2000년대 정보기술의 확산으로 0.6% 정도 노동생산성이 향상된 된 것과 비교하면 이는 대단한 효과인 셈이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19세기말 전기의 등장보다 더 큰 충격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공지능이 기업과 정부를 비롯한 여러 조직에 의해 널리 채택되고 계속 업그레이드됨으로써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과 혁신을 통해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편 이와는 상반되는 비관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일자리 소멸과 불평등 악화 및 극심한 양극화가 대표적인 부정적인 측면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필요 없어지는 분야가 점점 확산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은 기계로 대체될 것이며 사회는 부와 권력을 장악한 소수와 무력한 대다수로 양극화된다는 것이다. 일자리 소멸은 이 모든 비극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몇몇 기관들은 산업혁명 이후 항상 일자리가 증가했다는 경험에 근거해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IT 분야 세계적 자문회사 <Gartner>는 2020년까지 인공지능으로 인해 18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반면, 23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또한 2018년 “일의 미래”에 대한 <세계경제포럼(WEF)>의 예측에 의하면 2022년까지 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75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133백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한다. 일자리 소멸이라는 비관적인 전망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실제로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이나 로봇 관련해 새로운 일자리들이 상당히 창출되어 사라지는 일자리를 대체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전망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근거 없는 비관론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자기 완료적 에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어 결국 우울한 미래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들 기관이 주장하는 데로 단기적으로는 총체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인간이 필요 없어지는 영역이 확대될 것이고, 결국 일자리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한다. 인공지능 기술도 경제논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하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경쟁 우위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따를 것이므로 인간보다 효율적인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직무를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인공지능 알고리즘 개발에 전력투구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강조한 ‘쓸모없는 계층(useless class)’의 등장 가능성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은 유지될 수 있는가? 지금도 시장논리가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시장경제의 진화과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기업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채택해왔으며 소비자들은 만족을 극대화하는데 더욱 초점을 맞추어왔다는 점이다. 문제는 인공지능 시대에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이미 이런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장지상주의의 핵심에 담긴 도덕적 결점은 탐욕이고, 이 때문에 무책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이는 기껏해야 부분적인 진단에 불과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데 분명 탐욕이 큰 역할을 했지만 무언가 더 큰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생한 가장 치명적인 변화는 탐욕의 증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과 시장가치가 원래는 속하지 않았던 삶의 영역으로 팽창한 것이다.”
 
샌델은 시장지상주의로 인해 도덕적 가치가 퇴조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시장원리가 도덕원리를 구축(驅逐)하는 영역이 점점 확대됨으로써 시장사회로 변질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면서 이에 편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다면 이런 추세가 과연 우리를 어디로 내몰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새로운 시장경제 모델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해야 한다는 의미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한 다음 누구를 위한 시장경제인지 묻는다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쓸모없는 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을 간과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 가장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지침을 주는 개념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존엄이란 단순히 하나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각인된 원초적인 관념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지해야 한다. 이것은 인종, 종교, 성별 및 지위고하, 빈부격차 등 모든 요인들을 뛰어넘어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의 일부다. 누구든 태어날 때부터 뇌 깊은 곳에 존엄에 대한 지향성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민주국가의 헌법에는 존엄이 불가침의 권리로 명기되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장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있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사문화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존엄과 관련해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Gerald Huther)는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인간 뇌의 가소성(plasticity)으로 인해 존엄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에 있는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너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그러면서 휘터는 칸트에 따르면 존엄이란 “인간을 다른 창조물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위배되지 않을”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모든 것에 가격이 책정되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끼리 거래가 가능한 시장경제에서 과연 이것을 어떻게 실천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제 생활에서 이 정언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공허한 도덕적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는 더욱 그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의미에서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휘터가 제안하는 방안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경생물학자로서 인간의 뇌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바탕으로 존엄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인간의 뇌는 상당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관으로서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전략을 채택해왔으며, 그 결과 단순화(reduction of complexity)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복잡한 여건을 최대한 단순하게 환원해서 수용함으로써 비일관성이나 복잡성을 극복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유리한 전략을 채택해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과 긍정적인 현상이 복합적으로 발생해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다보면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지속되는데, 이는 인간의 뇌가 쓸데없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이는 결코 우리 뇌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휘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될 때, 우리 뇌에는 특별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진다. 바로 존엄이라는 표상이다.”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을 존엄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조차도 존엄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 뇌로 하여금 불필요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일로서 열역학 제2법칙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즉 존엄을 수용함으로써 에너지 소모가 상당히 줄어들고 삶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는 의미다. 이것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라”라는 동서양 공통의 황금률(Golden Rule)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기술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가운데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는 지혜다. 이런 이상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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