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 : 국민연금관리공단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시대적 소명

왕거일(王去一)이 ‘쓸쓸한 밤 홀로 술을 마시며 회포에 잠긴다(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며 시로서 말을 건넨다.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李白)은 ’왕거일의 한야독작유회에 (答王去一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독작유회) 답하기를... “수많은 글들이 한잔 물만도 못하다네 /세상 사람들은 이걸 들으면 모두 머리를 흔들 것이네/ 마치 동풍이 말의 귀를 스치는 것 같이.(萬言不直一排水/만언부직일배수, 世人聞此皆掉頭/세인문차계도두. 有如東風射馬耳/유어동풍사마이)”라고 읍조린다. 왕거일은 시로 자신의 처지를 이백에게 호소한 듯하다. 이백은 달이 휘영청 밝고 추운 밤에 독작을 하고 있는 왕거일의 쓸쓸함을 생각한다. 기술에 뛰어난 인간이 천자(天子)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만적(蠻賊)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운 인간이 권력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이다. 만방에 미치는 훌륭한 글들이라도 지금 세상에서는 한 잔의 물만한 가치도 없다. 그것을 듣고 마이동풍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한다.

당시 이백의 심정은 오늘날 국민연금의 행동 및 모습에서 많은 이들이 느끼는 심정과 다를리 없을 것 같다. 정말 이치를 모르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면 가르치면 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아일랜드의 극작가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는 주변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그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며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반인간적인 감정이라고 말했다.

지금 세상은 바뀌고 있는게 아니라 바뀐지 한참 됐다. 사회책임투자의 강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국민연금이 이 흐름에 동참해야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국민연금공단의 지배구조가 문제 있다고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국민연금공단은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이자 내년 4월 공단이 있는 전주지역 총선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이다. 기금운용 책임자인 기금운용본부장은 공단 이사장의 임명 제청을 받아 복지부 장관이 선임한다. 복지부 장관이 기금위 위원장도 맡기 때문이다.

마이동풍인지? 신구자황(信口雌黃)인지?

재계 일각에서는 독립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민연금이 문제기업을 선정할 때마다 잡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다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 격이다. 외려 국민연금공단이 그동안 마이동풍(馬耳東風)이나 우물쭈물 행보를 해온 속내도 다름아니다. 국민연금법에 주식과 채권에 대해 사회책임투자 관련 근거가 마련된 건 2015년이다. 국민연금은 이 근거조항이 마련되기 훨씬 전인 2006년부터 사회책임투자를 시행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변한건 없다. 눈가리고 아웅이나 마이동풍이 이정도면 역대급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않고 있다는게 정답이다. 세계적인 추세와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의식있는 교수, 관계전문가 등은 물론이고 시민단체들까지 나섰겠는가. 지난 29일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환경운동연합, 기업과인권네트워크는 '국민연금 사회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초안에 대한 입장'을 통해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활성화는 바로 국민연금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유니버셜 오너십(Universal Ownership)을 가진 연금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민과 우리 사회가 투자한 자산이니 참여나 철회 양자 택일의 소극적투자가 아닌 적극적 오너십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5일 2019년도 제6차 회의를 열고 복지부와 국민연금으로부터 '국민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초안을 보고 받긴했다. 기금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에 관한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방안은 크게 논의 필요사안, 주요 추진사항으로 나뉜다. 논의 필요사안에 ▲책임투자 대상 자산군 ▲책임투자 전략 ▲위탁펀드 규모확대가, 주요 추진사항으로 ▲책임투자 원칙 등 지침 제·개정 ▲책임투자 담당조직 역량강화 ▲책임투자 위탁펀드 운용 내실화 ▲기금본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지표 결정·개선 및 평가결과 활용도 제고 등이 담겨 있긴 하다. 국민연금은 향후 위원회 논의를 거쳐 오는 9월까지 최종안을 확정짓다고 했는데도 신뢰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그들만의 말의 성찬(盛饌)에 그친 탓이다.

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은 각성해야...

말을 조심하라는 경구는 동서고금에 수없이 많다. 특히 신구개하(信口開河)도 워낙 그런 일이 많아서인지 경계의 말로 종종 쓰인다. ‘내키는대로 마음대로 지껄인다’는 이른바 ‘아무말대잔치’라는 의미다. 원(元)나라 때 희곡중 잡극 창시자라 하는 관한경(關漢卿)의 노재랑(魯齋郞)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지 말라(你休只管信口開合/ 니휴지관신구개합)’는 대사가 ‘국민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과 일맥 상통한다는 느낌까지 든다.사실이나 진상을 따져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거나 남의 말이나 글 등을 무책임하게 비평하는 신구자황(信口雌黃)이라는 말이 더 잘어울릴지 모르겠다. 자황(雌黃)은 옛날 글을 정정할 때 쓰던 지우개다. 잘못이 드러나면 ‘아니면 말고’식으로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사회책임투자 활성화 로드맵이 담긴 '국민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을 내놨지만 여전히 책임투자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야한다. 국민연금이 사회책임투자 활성화를 위해 하루빨리 그 대상을 채권, 대체투자 등으로 확대하고 위탁펀드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국내총생산(GDP)의 40%에 해당하는 700조원의 적립금을 가진 세계 3위 규모의 연기금이다. 현재 사회책임투자 펀드는 지난해 기준 26조7400억원으로 총자산 대비 4.2%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직접운용은 22조1600억원, 위탁운용은 4조5800억원이다. 특히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위탁펀드 규모는 전체 국내주식 위탁운용 규모 대비 8.98% 수준이다. 네거티브 스크리닝 방식의 제한 투자도 필요하다. ESG 평가지표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산업이나 기업, 프로젝트에 대해 투자 전면 배제와 투자비중 제한 방식을 국내외 모든 자산군에 적용해야 한다. 이밖에 수탁자책임전문위가 사회책임투자를 맡는 책임투자분과와 스튜어드십코드 시행을 맡는 주주권분과로 이원화돼 있는 것의 통합도 시급한 과제다. 국민연금은 오는 9월까지 모두가 공감하는 제대로 된 최종안을 내놓길 바란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더 이상 늦추거나 멈추려 하면 안된다. 우리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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