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미국의 삼각 딜레마, 해법은 있는가?
한국·일본·미국의 삼각 딜레마, 해법은 있는가?
  • 이영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19.07.2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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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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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기업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중간 소재의 수출 규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우호국)’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책임 및 사죄와 관련된 정치적 갈등이 경제적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기술문명의 시대에 한 국가의 정부가 이와 같은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이성적인 요소가 아니라 감정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frontal cortex)은 감정적인 반응을 관장하는 변연계(limbic system)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것을 시스템 I(감정적인 뇌)과 시스템 II(논리적인 뇌)의 관계로 설명했다. 우리 모두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여기서 최근 불거진 한일 간의 문제는 미국을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과 일본의 비이성적·비상식적 태도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인 대응 방안이라는 관점에서 간략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에 대해 취해진 조치를 살펴보면, 전범국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하였지만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당시 연합국의 주축인 미국은 서둘러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 이 과정이 얼마나 황당했는지는 한국현대사에 정통한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지적했듯이 이는 당시 일본을 주축으로 해서 부상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 미국에게 한국은 부당하게 합방된 자주국가가 아니라 일본 영토의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커밍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만약 어떤 동아시아 나라를 분단해야 했어야 했다면 그것은 일본이었다. 그 대신 한국과 중국, 베트남이 모두 2차대전의 여파로 분단되었다. 한국을 분단할 내부적인 구실도 없었다........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그런 분단들은 전 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왔으며, 다른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 있다.........그러나 민족분단은 한국인들이 한 짓이 아니었다. 38도선에 대한 주된 책임을 져야 할 쪽은 미국이다.”

당시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시대를 시작하면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일본의 분단 대신 한국의 분단을 택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미국은 이와 관련해 지금도 도덕적·정치적·경제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방으로서 무조건 미국에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할 수 있는 대목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60년대 초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소련과 체제경쟁을 하던 미국으로서는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편,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속히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조지 워싱턴 대학의 정치학자 그렉 브라진스키(Gregg Brazinsky) 교수는 『대한민국 만들기(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1963년과 1966년 사이에 한국 국민의 격렬한 반대가 예상되지만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몇 가지 핵심 사안을 강행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안건에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등 외교 사안과, 수출 장려, 원화의 평가절하 등 국내 정책이 포함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 미국이 원하는 안보를 유지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 독재를 강화했지만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룩했기 때문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격렬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미국은 처음에는 저지하려했지만, 곧 그의 결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지지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현재 불거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미국은 일정부분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필자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감정적인 골이 깊어 이성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과거의 책임 중 일부라도 통감한다면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을 설득하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호적인 국가 간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한일 간의 갈등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 논의해보자. 필자는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등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더 이상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결코 우리의 정당한 인도주의적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에게 역습을 가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반면 그들이 줄기차게 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과거 우리 정부가 무능해 일제에 합방을 당했고, 그 여파로 많은 국민들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초를 당한 데 대해 정부 차원에서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으로 과거를 마무리 짓는 한편, 일본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국력을 배양하는 데 전력투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듯이 정말 참담한 것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총 6,046억 달러(약 708조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2010년까지 35년 간 매년 적자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다가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 줄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 정부의 무감각 내지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간단한 통계만 봐도 일본과의 갈등은 일본제품 불매 운동과 같이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님이 드러난다. 감정적으로는 일본을 배척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달리 행동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파워엘리트들이 이 점을 간과할 리 없다.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일본에 갈 때마다 향수에 젖어 일본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일본에 대해 인도주의적·도덕적 관점에서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대일 무역적자가 누적되어 온 현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안이다. 국력이 쇠약하고 국론이 분열되어 일제의 식민지로서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면 이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면 이런 반성을 바탕으로 대일 무역적자의 축소 내지 해소를 목표로 하는 정책들이 추진되었을 것이고 일정한 성과를 이룩했을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당당하게 일본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광복 이후 한국 정부의 고질적인 단기주의(short-termism)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정서적인 면에서 무역적자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했다면, 이 정도로 방치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정권 차원에서 단기적인 정책들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적자 기조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경제학자로서 이 점에서 일말의 책임을 통감한다. 우리 모두 반성할 대목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대일 무역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장기계획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고 감정에 휩쓸리고 여론에 밀려 졸속으로 정책을 추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장기주의(long-termism)의 관점에서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필자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의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일본의 정책에 대응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도 장기주의의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나 일본 여행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을 무모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단, 이것만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역전시키는 데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극일(克日)은 일본인들이 우리를 존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적으로 강국이 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 수준이 과연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수준에 있는지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이 또한 장기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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