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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한화회장과 여불위(呂不韋)... 그리고 범려(范蠡)

M&A(mergers and acquisitions),기업의 인수합병(引受合倂)을 통칭한다. '인수'는 하나의 기업이 다른 기업의 경영권을 얻는 것이고, '합병'은 둘 이상의 기업들이 하나의 기업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기업자산인 인적 물적인 요소가 다 포함된다. 목적은 사업확장, 기업경영 및 운영의 효율성 향상, 기업생존 ,투자전략 등이다.

중국 전국시대 말에 중국을 통째로 먹어버린 엄청난 M&A가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이자 정치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싸게 사다가 비싼 값으로 넘겨, 수천 금의 재산을 모았다.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그는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외친다. 진귀한 물건으로 사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간다.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손아귀에 넣은 뒤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이 되자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으나  그는 성공한 M&A(?)로 중국을 손에 넣는 성과를 냈다. 기본 재력과 예지력, 교섭술, 선전술, 그리고 운을 성공 비결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 M&A의 귀재’,‘M&A 승부사'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붙은 별명이다. 김 회장은 그룹이 정체될 때마다 M&A로 돌파구를 찾았다. 알짜기업을 인수해 신성장동력으로 삼았다. 그의 경영공식이 되다시피 했다. 올들어 아시아나 항공 등 큰 물건이 시장에 나와 있고 김 회장의 집행유예가 종료된지도 3달 이상 지났다. 자연스레 그의 경영복귀는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언론도 한화그룹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해 12월 7년 만에 베트남을 방문해 현지 공장 준공식 참석하는 등 사실상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올초 문재인 대통령 초청으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에 참석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한화 에어로스페이스가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있는 항공엔진 부품 전문업체 'EDAC'의 지분 100% 인수계약을 끝냈다.정중동(靜中動)이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경제인이 되는길 

그의 M&A 역사는 화려하다. 지난 1981년 총수에 오른 아듬해인 1982년 곧바로 M&A에 나서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케미칼)을 인수했다. 인수 당시 매출 1620억원이던 한화케미칼을 매출액 10조원(2017년 9조3418억원)짜리 회사로 키웠다. 2002년에는 누적 손실이 2조3000억원이던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접수해 6년 만에 흑자전환시켰다. 한화생명은 총자산 100조원을 넘어섰고 지난해 영업이익만 6501억원을 냈다. 2012년에는 독일 태양광 업체 큐셀(현 한화큐셀)을 인수했다,

2015년 삼성과의 방산·화학 ‘빅딜’은 그의 M&A 여정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2조원이라는 자금을 투자해 삼성종합화학(현 한화종합화학)과 삼성토탈(현 한화토탈),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까지 인수하는 과감함을 보여줬다. 성과는 엄청났다. 한화토탈은 2년뒤 1조5162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그룹 내에서 지주사를 제외하고 영업익 1조를 내는 계열사는 한화토탈이 유일하다. 한화종합화학도 2017년 5706억원을 벌었다.

김 회장은 경영외적으로는 부정적인 일화들로 세간의 화제도 적지 않게 뿌렸다. 자식 문제를 빼더라도 본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게 대부분이다. 좋게 보면 의리 있는 상남자다. 그의 리더십을 의리 경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않다. 실제로도 화통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객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한다. 흑역사로 여겨지는 일화들에서도 적지않게 그의 성격이 비치곤 한다. 본인은 세간에 알려진 이런 이미지를 조금 부담스러워 한다는 후문이다. 실제 2010년 인터뷰에서는 기자에게 "주변에서 이미지 관리 좀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좀 묻고 싶다." 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중국에서 꽤 이름있는 역사소설가인 셰스쥔(謝世俊)이 춘추시대 책사이자 경제인인 범려(范蠡)를 소재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한국에서도 출간됐다. 책 제목이 상성(商聖).' 경제인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되나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주인공 범려를 돌이켜 보면 크게 무리는 아닐듯 싶다.

범려에게서 배우는 경제인의 자세

춘추시대 당시 범려는 월왕 구천(勾踐)을 도운 최고의 책사지만. 단순히 책사로만 규정짓기 힘들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범려는 오를 멸망시킨 이른바 M&A한 월나라 상장군아닌 '후세사람이  재신(財神)으로 받들었다"고  적고있다.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상업을 크게 일으켜 천하 제일의 갑부가 된 경제인이다. 그는 오늘날 대만에서 관우가 숭배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큰 부자를 말한다는 도주지부(陶朱之富)의 고사성어도 범려의 얘기다.도주공(陶朱公)의 부(富)란 뜻이다. 도주는 범려의 노년시절 이름이다.

여불위는 최고의 자리에 이르러 변신을 하지 못하고 상인 시절의 주판을 계속 끼고 살다 비참한 최후를 자초했다. 범려는 결이 달랐다. 변신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덜어냈다. 경제인으로서 큰 돈을 벌었던 비결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다. 그의 정치적 처세에도 해당되는 논리일 것이다. 시장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운용 자금의 흐름을 빠르게 하고 이를 위해 단계를 줄이는 유통이 필요하다. 파는 물건의 품질을 보장해야 한다. 이게 바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신용이다. 인재의 중요성을 알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마직막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언급했다. 막대한 재물을 모았다면 바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여불위가 더 현명했다면 영화가 최고에 이르렀을 때 주판을 손에서 내려 놓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원래 성품을 다잡지 못한 탓이다. 김승연 회장도 이제는 일흔을 바라본다.이젠 여불위보다는 범려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완벽했던 범려도 자식농사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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