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우리가 화폐(money) 또는 통화(currency)라고 부르는 돈은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으며, 오늘날 돈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화폐로서의 돈과 통화로서의 돈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금과 같이 돈의 가치를 보장해주는 실물이 준비되어 있는가, 아닌가는 돈이 시중에서 원활하게 유통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정부가 돈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 관행으로 된 시대에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화폐와 통화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가상화폐(virtual money)나 암호화폐(crypto currency)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화폐와 통화는 상호 교차 사용되고 있다.

화폐의 등장이 인류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화폐제도가 발달한 문명은 오랫동안 번성했으며, 그렇지 못한 문명은 급속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화폐의 출현과 관련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왔는데, 주류 경제학에서는 물물교환의 불편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화폐가 교환과정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과거 절대군주가 세금 징수와 전쟁 수행을 위해 돈을 만들어 사회에서 유통되도록 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필자는 이것이 더 타당한 주장이라고 본다. 돈이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지만 당시 이런 합의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권력자가 강제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경 터키에 있었던 고대왕국 리디아(Lydia)에서 인류 최초의 주화인 일렉트럼(electrum)이 사용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로 등장한 이래 돈을 사용해온 것은 2,700여 년에 불과하므로 지구의 역사, 더 압축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기간이다. 그렇지만 이 기간 동안 인류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의 바탕에는 돈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돈은 ‘궁극적인 인클로저(ultimate enclosure)’로서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상징한다. 그리고 비록 돈에 대한 욕망이 다른 욕망보다 더 강렬하다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회·경제 시스템만 갖춰진다면, 이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전환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사적선(private good)을 공동선(common good)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은유를 통해 역설하고자 했던 미덕이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날 돈은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특히 금융자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돈의 부정적인 위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여기서 논의하려는 것은 돈의 원래의 의미. 즉 교환 과정에서 거래 쌍방에게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공동선의 의미를 회복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돈, 즉 통화의 종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통화는 본원통화와 예금통화로 구성된다. 그리고 본원통화는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금과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통화로 구성된다. 예금통화는 신용창조 과정을 거쳐 시중은행이 창출하는 통화로서 통화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예금통화의 비중이 통화량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대상은 현금, 즉 종이화폐(paper money)다. 우리는 오랫동안 현금을 사용해왔기에 인터넷뱅킹과 모바일페이가 활성화된 현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금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 돈에 대한 관념에 차이가 있다면 젊은층에 비해 노년층이 현금에 더 집착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도 노년층에 속해서 그런지 지갑에 일정 액수의 현금을 보유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쨌든 소액인 경우 신용카드나 모바일 페이를 이용하기 보다는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개인의 경우 어떤 방법으로 결제하는가는 전적으로 편리함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액 결제의 경우 모든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결제의 편리함에 의해 좌우되며,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별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큰 금액을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즉 이런 거래 자체가 알게 모르게 거래와 무관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자면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y)를 유발한다, 이 점은 기업의 비자금 조성, 공직자의 뇌물 수뢰, 조세포탈 및 회피, 범죄 집단의 불법적인 거래, 인신매매나 마약거래, 테러 관련 자금거래 등 실로 다양한 비정상적인 거래가 현금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은 모두 사회통합의 기본 요소인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거래에는 예외 없이 고액권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5만 원 지폐는 원래 의도와는 달리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더라도 고액권 지폐가 각종 범죄나 부정부패 및 조세포탈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100달러 지폐, 유럽에서는 500유로 지폐가 여전히 별 문제 없이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고액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범죄나 부정부패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올해부터 유럽에서는 500유로 지폐를 더 이상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미 발행된 500유로 지폐는 그대로 유통되므로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해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보면 더욱 불가사의하다. 왜 그런 고액권이 필요한지 우리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을 대표하는 인공지능 전문가이자 벤처 사업가인 카이후 리(Kai-Fu Lee)가 저서 『AI, Super-Powers』에서 지적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알리페이나 위쳇을 이용한 모바일 페이가 보편화되어 현금으로 결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둑질을 하려고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해 점포를 털려던 두 형제는 자신들의 여행경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의 현금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힌 후 “왜 이렇게 현금이 없는가?”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중국은 이미 현금이 필요 없는 사회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에서는 우리보다 한 참 앞서 나아가고 있다. 뭔가 와 닿지 않는가?

현금 없는 사회와 관련해서는 이미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 교수가 저서 『화폐의 종말(Curse of Cash)』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로고프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종이화폐가 폐지된다면 첫째, 반복적인 대규모 익명성 자금 이동을 어렵게 함으로써 탈세와 범죄를 줄이는 데 심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둘째, 종이화폐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일은 중앙은행이 제한 없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명료한 접근법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금 없는 사회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므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거래가 컴퓨터를 이용해 이루어지므로 현금 대신 전자화폐가 대세인 시대이기에 현금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가상화폐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결코 단독으로 모든 화폐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기에 현금 유통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추진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마이너스 금리는 경기를 활성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시중에 상당량의 현금이 유통되고 있으면 이런 금융정책을 실시하기 어렵다. 마이너스 금리를 피하기 위해 모두 현금을 보유하려 할 것이고, 그 결과 금융정책은 무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하경제의 활성화를 막고 금융정책의 기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도 로고프 교수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인터넷 뱅킹과 모바일 페이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다. 이런 상황에서 고액권 지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 의도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범죄나 부정부패 또는 조세포탈과 연루되어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끊이지 않고 있는 기업의 비자금 조성, 정치인과 관료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범죄조직의 마약거래나 기타 범죄행위 등 사회의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행위들을 원천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액권 지폐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반대중의 정상적인 거래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소액권과 동전을 유지하면 된다. 물론 이와 관련된 문제가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기 때문에 고액권 지폐의 사용 금지에 따른 득실을 깊이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성적 판단보다 직관이 더 정확한 경우가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필자의 직관이다. 특히 현금을 선호해온 한국사회가 진일보하는 길은 현금 없는 사회로 변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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