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얼마 전부터 미디어에서 포용국가, 포용적 성장, 포용적 제도 등 ‘포용성(inclusiveness)’을 함축하는 용어들이 종종 거론되어왔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벌써부터 여러 기관들이 ‘포용’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IBRD와 IMF 같은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금융적 포용(financial inclusion)이란 용어를 사용해왔다. 그리고 세계경제포럼 2017년 총회에서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과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을 주제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성장과 포용은 상보적(相補的)이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였다. 포용이란 문자 그대로 더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면서 동시에 발전의 성과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용’ 개념을 국가 정책의 기본 방향에 반영하는 것은 충분히 지지받을 만하다. 만약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아마 그 주된 이유는 이런 명분을 선점하지 못하였다는 시기심 때문일 것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이라면 ‘포용’을 지향하는 정책이나 사회운동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국제적인 분위기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부는 2019년을 ‘혁신적 포용국가 원년’으로 선언하고 2월 19일 포용국가 사회정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아직은 하나의 ‘안’으로 발표된 것이지만 그야말로 대단한 비전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이 ‘안’대로 실현된다면 목표연도인 2022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복지국가로 변신해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 과거 정부가 추진했던 비전과 비교해 진정성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역대 정부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정책을 제시했을 뿐 결국 국민들에게 허탈감과 배신감만 주지 않았던가? 예컨대 747정책이니 창조경제 등은 모두 허구임이 드러나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 문제를 한 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제시한 목표는 ‘혁신적 포용국가’이다. 지금까지 추진했던 혁신성장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목표를 유지하는 가운데 포용국가의 개념을 접목시킴으로써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정책 수단과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 가운데 너무 많은 목표를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정부가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혁신적 포용국가’는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국민의 삶의 질 개선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는 국가발전전략이다. 모두 타당한 목표이므로 이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계경제포럼에서 경제성장과 사회적 포용이 상보적임을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혁신적 포용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에는 국민의 삶의 영역을 생애주기의 관점에서 다섯 분야, 즉 돌봄, 배움, 일, 쉼, 노후로 분류하고 각 영역별로 주요 과제들을 선정해 목표연도인 2022년에는 상당 수준의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구체적인 수치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생활기반을 소득, 안전·환경, 건강, 주거·지역으로 분류한 후 2022년에는 주요 정책목표에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지도록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책안대로 실현된다면 국민 누구나 생애주기에 걸쳐 지금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인간적으로 대접받으면서 건강한 가운데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필자에게는 이 모든 일을 정부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할 테니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안심하고 그냥 기대하고 있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발상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국민을 존중한다면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해 국민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양해를 구할 사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과거와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적인 정부라는 오명을 벗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명분이 훌륭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점에서도 감춰져 있는 본심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제는 일방적으로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부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식의 발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불확실성과 변화의 시기에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국민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사상적·철학적 기반이다. 새로운 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받으려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탈진실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추진되는 정책은 단지 정권재창출을 위한 술책으로 매도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앞으로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사전 노력도 없이 온정주의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포용국가를 추진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자처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포용국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된 데는 몇 해 전 출판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MIT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하버드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이 공저한 이 책은 포용적 정치제도와 포용적 경제제도를 채택한 나라들은 번영했던 반면, 착취적 정치제도와 착취적 경제제도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모두 몰락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이들의 주장이 제도라는 간단한 요인을 바탕으로 국가의 흥망을 논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 점도 있지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 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들의 주장을 상세히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주장한 포용적 제도를 위한 전제조건을 논의하려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포용적 의식(inclusive consciousness)이다. 포용적 의식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필자가 말하는 포용적 의식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에고’로 한정하는 제약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과 연민(compassion)을 갖도록 정체성을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연결의식(connected consciousness)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네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남을 대접하라”는 동서양에 공통된 황금률(Golden Rule)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포용적 의식을 갖추지 않은 사회에서는 일시적으로는 이런 제도를 흉내 내려는 움직임이 있겠지만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권정치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미국은 점점 포용국가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나은가?

필자는 사람들이 포용적 의식을 갖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발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활발한 사회적 담론을 통해 이 방향으로 유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효율과 평등의 관계”에 대한 담론을 들 수 있다. 과거 경제정책의 기조는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효율과 평등의 상충관계 논리이다. 이를 근거로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은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정당화되었다. 성장은 효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효율과 평등의 상보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점점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불평등이 지나치게 악화되면 이로 인해 성장의 잠재력이 고갈되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침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가지고 나름 고민한 결과 불평등의 악화는 비효율을 초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고갈시킨다는 데 공감하게 되었다. 물론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공개적인 토론과 담론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밝히는 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효율과 평등은 상보적이라는 견해가 지지를 받게 된다면 혁신적 포용국가의 추진전략은 사상적 지지 기반을 얻게 될 것이다. 정부가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문제의식 있는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담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주권자로서 혁신적 포용국가를 만드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국민을 단지 무상복지나 보편적 복지만을 요구하는 그런 존재로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포용적 제도 및 그 전제조건으로 포용적 의식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업의 맥락에서 살펴보자. 현재 ‘주주가치극대화’가 기업의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사실 미국에서도 이것이 기업의 목표로 부상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비판이 점점 지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관련된 논의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우리나라 기업들은 주주가치극대화를 더욱 지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이것은 포용적 의식과는 배치된다는 데 있다.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종업원, 채권자, 소비자, 지방자치단체 등 다른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을 모두 무시하거나 배제해도 좋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착취적 의식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는 포용국가의 기반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의 모두 고려하는 가운데 사업을 영위하려면 대주주를 비롯한 전문경영자 및 임원들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포용적 의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식의 변화 없이 기업이 갑자기 주주가치극대화의 원칙을 버리고 이해관계자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부가 포용적 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면 이를 담당하는 관료 및 정치인들이 포용적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추진하는 개혁은 대체로 용두사미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에서 월가의 막강한 로비로 인해 금융위기의 재발을 위해 발의되었던 “도드-프랭크 법”이 사실상 거의 사문화된 상태로 있는 것이 이런 사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추진되었던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을 막으려던 시도가 모두 흐지부지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모두 포용적 의식이 결여된 정치인과 관료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의식에서 나온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려 한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 중 대표적인 것이 지대추구행위이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몫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벌이는 각종 로비나 유착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 지대추구행위에 중독되어 있다. 필자는 이것은 과거 봉건의식의 잔재가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심지어는 주민들이 모여 아파트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담합한다는 사실에서 지대추구행위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의식 상태에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포용국가를 추진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포용국가를 추진하고, 실현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포용적 의식을 갖출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장을 활성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파워엘리트들 스스로 포용적 의식을 갖추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사상적·철학적 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추진되는 모든 개혁은 결국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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