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반올림이 조정위원회의 중재판정을 받아들이고 이행에 합의하는 '이행합의 협약서'에 23일 서명했다. 왼쪽부터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 사진:구혜정 기자

"소중한 동료와 그 가족들이 오랫동안 고통받으셨는데 삼성전자가 이를 일찍부터 성심껏 보살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픔을 충분히 배려하고 조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들과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가 삼성전자가 유발한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삼성전자와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원회)의 중재판정을 받아들이고 이행에 합의하는 '이행합의 협약서'에 23일 서명했다. 

삼성전자는 보상 업무를 제 3의 독립 기관인 법무법인 지평에 위탁하기로 했으며,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원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2028년까지 차질없이 이루기로 했다.

이로써 삼성 백혈병 논란이 불거진 지 11년 만에 양측 간의 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왜 이렇게 길고 긴 시간이 흘러서야 봉합이 됐을까?

앞서, 2007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3라인에서 근무했던 고(故)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및 LCD사업장 근로자들의 건강 위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 3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라는 시민단체가 생겼다. 고(故)황유미씨의 아버지인 반올림 황상기 대표는 반올림이 본격적으로 반도체 및 LCD 사업장 근로자들의 건강피해 문제를 제기하고, 사업장에서 근무한 근로자들에게 나타나는 백혈병 등의 질환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정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것을 촉구 하는 한편, 삼성전자에게도 피해보상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삼성전자와 근로자 측 사이에 위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한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으나 원만한 타결에 이르지 못한 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1차 조정

시간이 지나 2014년 10월, 삼성전자와 피해자 측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정을 맡기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14년 11월 조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해 12월부터 조정절차를 개시했다. 

이후 2015년 7월까지 여러 차례 삼성전자, 반올림 및 피해자 가족 측과 회의를 가지는 등 조정절차를 거치고, 산업보건과 법률 분야의 전문가 자문을 받아 당시에 조정권고안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1차 조정안은 당사자들간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무산됐다. 삼성전자가 2015년 9월 자체 보상안을 발표하고 자체적으로 보상을 실시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1차 조정은 결렬됐다. 

보상 등 나머지 의제와 관련하여 반올림 측 피해자는 삼성전자의 자체 보상안에 따른 보상을 거부하고 2015년 10월 7일부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하면서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조정은 중단된 채로 다시 많은 시간이 지나게 된다.

23일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가 반도체 피해자측에 공식 사과했다 사진:구혜정 기자

반올림과 삼성의 계속된 교착상태 

이후 천막농성이 이어지면서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거의 모든 교섭이나 협상이 중단됐고, 삼성전자와 반올림간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었다. 조정위원회에서도 더 이상의 조정은 하지 못한 채 두 해를 넘겼다.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2017년 5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에서 반올림과 '삼성직업병 문제해결과 노동안전 정책협약'을 맺으면서 대화 재개의 물꼬가 트였다. 이후 대화 재개를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질병보상의 특성상 사안이 복잡한데다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 장기간 대화중단으로 인한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이라 협상이나 조정은 물론 대화 채널의 복원조차 쉽지가 않았다. 

조정위원회는 "이처럼 장기간 대화가 중단되면서 반올림 피해자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삼성전자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계속됐다"라며 "1차 조정이 결렬된 후, 조정위원회로서도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라고 말했다.

2차 조정 재개와 계속된 갈등

그러던 중 올해 초, 다시 한 번 조정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2018년 3월부터 1차 조정 당시의 쟁점과 양측의 요구사항은 물론 그 이후의 쟁점과 양측의 요구사항을 조정위원회는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그동안 이루어진 삼성전자, 동종업계인 SK하이닉스 및 LG디스플레이의 지원보상제도를 살펴봤으며, 여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조정위원회는 2차 조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2차 조정도 1차 조정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 됐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다양한 당사자가 다수 모여 있기 때문에 단계마다 불가피하게 일부는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는 배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여러 기업에서도 새로운 산업보건 지원보상제도를 도입하고,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의 직업병 판정기준도 일부 완화됐만 양 당사자가 상대방으로 있는 조정과정은 전반적으로 다툼이 벌어지는 전선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했다. 조정위원회는 실제로 2차 조정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양상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조정위원회는 2차 조정 만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정위원회는 "2차 조정마저 실패로 돌아간다면 상처만 헤집고 불신과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염려됐다"라고 설명했다.

2차 조정의 돌파구는 '조정'이 아닌 '중재'

고민 끝에 조정위원회는 조정방식 대신 중재방식을 검토했다. 중재방식이란 '양측이 조정위원회에서 제시하는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사전에합의하는 방식'으로 조정위원회에 백지위임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쉽게 말해, 합의서에 먼저 도장을 찍으면 조정위원회에서 합의문을 작성하는 방식이다.

올해 7월 18일 조정위원회는 양 당사자에게는 물론 공개적으로 조정방식 대신 중재방식을 제안했고, 양 당사자가 조정위원회의 설득과 권유를 받아들인 끝에 올해 7월 24일 삼성전자와  반올림, 그리고 조정위원회 3자는 중재방식에 의한 문제 해결에 합의를 이루게 됐다.

23일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와 고(故)황유미씨의 아버지인 반올림 황상기 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구혜정 기자

중재안 최종 도출

조정위원회는 중재방식 합의 이후, 당일부터 조정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총 9차에 걸친 조정회의를 개최하여 지난 조정과정과 그 이후 진행된 사안별로 쟁점을 정리하여 중재안을 만들었다. 새롭게 적용할 질병보상안을 만들기 위해 한국산업보건학회에 자문을 요청하고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질병보상안의 작업이 진행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난 10월 말 최종 중재안이 완성됐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중재판정서를 반은 후, 바로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조정위워회에서는 '양 당사자간 합의'를 하도록 요청한 3개 사항에 대하여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한 사항은 '지원보상업무를 위탁할 기관은 법무법인 지평으로 한다', '지원보상위원회의 위원장은 법무법인 지평의 김지형 대표로 한다', '500억원의 산업안전 발전기금을 기탁할 기관으로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 한다'이다.

이렇듯, 11년만의 사태 해결은 중재를 통한 양측의 극적 합의로 가능했다. 어렵게 양측이 합의한 중재안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보상 범위를 확대한 것이 핵심이다. 삼성전자 최초의 반도체 양산라인인 기흥사업장의 제1라인이 준공된 1984년 5월17일 이후 반도체나 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현직자 및 퇴직자 전원과 사내협력업체 현직자 및 퇴직자 전원을 대상으로 정했다. 지원보상 기간은 1984년 5월17일부터 2028년 10월31일까지로 했다. 그 이후는 10년 후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지원보상 범위는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다발성골수종, 폐암 등 16종의 암으로 지금까지 반도체나 LCD 관련 논란이 된 암 중에서 거의 모든 암을 포함하기로 했다. 희귀암 중에서 환경성 질환은 모두 포함하며, 다발성 경화증, 전신경화증, 근위축성측삭경화증 등 환경적 요인에 의해 발병한다고 알려진 희귀질환 전체도 포함했다. 

조정위원회 김지현 위원장은 이번 조정 및 중재에 대해 "노동현장에서 부딪히는 직업병 문제에 대해 큰 획을 긋는 사건이다" 라며 "이번 조정 및 중재를 계기 삼아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이날 협약식에 자리한 심성정 의원은 "고(故) 황유미 씨가 세상을 떠난지 11년만, 중재조정이 시작된 지 4년만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번 합의는 우리사회의 귀중한 사회적 합의 모델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종 합의까지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 걸려서일까. 이날 협약식에 참석한 고(故)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반올림 황상기 대표를 비롯해 반도체 피해자들과 반올림 관계자들은 협약식이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빠져 텅빈 공간에 남아 서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 이곳을 떠났다. 1000일 넘게 이어진 천막 농성도 이로써 해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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