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스틸컷

이번 추석 연휴에 종묘를 찾았다. 학창시절 늘상 다녔던 종묘 앞길이었지만 이곳을 일부러 갔던 기억은 나질 않는다. 광장시장에서 배를 채운 후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매표소에서 표를 끊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 보였지만 그 예전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설마하니 내가 종묘를 한 번도 가지 않은 걸까? 그래도 명색이 역사강사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내가….

어느덧 이곳은 세계무형유형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그림처럼 펼쳐있는 정전과 영녕전에는 조선 국왕의 신주가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고 궁이 아닌 사당이어선지 경건한 관람을 문화해설사는 당부하였다. 조선의 모든 왕이 이곳 종묘에 신주로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두 사람만은 빠져 있다고 한다. 어렵지 않은 답이다. 연산과 광해. 그래 연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광해는 조금 아니 상당히 억울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TV에선 추석특집영화로 광해가 방영되었다. 여러 번 본 영화지만 어쩌면 지금의 우리네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까 싶어 다시 몰입하여 보았다.

광해는 천만 명을 동원한 대박 영화다. 작가가 인정했듯이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의 컨셉을 차용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의 첫 장면은 광해가 결국 들어가지 못했던 종묘의 정전이 눈에 쌓여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막이 뜬다.

광해군, 8년 역모의 소문이 흉흉하니 임금께서 은밀히 이르다. 닮은 자를 구하라. 해가 저물면 편전에 머물게 할 것이다. 
마치 인조실록에나 나올법한 글귀다. 그러나 가짜다. 관객을 교묘히 사실과 혼동시켜 역사 속의 이야기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자막은 숨겨야 할 일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광해군 일기. 이건 진짜다. 영리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광해는 두 가지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대동법의 시행과 중립외교다.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로 국가가 존속되고 있었고 예로부터 명을 아버지 나라로 섬겨왔다. 광해는 이런 대의명분을 깬 것이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는 어떤 사대와 명분이라도 필요하다면 새로운 원칙을 세울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조선의 국왕이다. 대단한 용기다. 광해군 정권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서인당을 짐짓 무시하고 소수파인 북인과 손잡고 후금과 화친을 도모한다. 

영화 속 가짜 광해는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나는 비록 빼앗고, 훔칠지언정 내 군사들은 살려야겠소.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 소중하오”
이 대사 하나로 관객 동원 삼백만 명은 더 영화관을 찾지 않았을까? 공물을 명에 더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들에게 광해는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며 호통을 친다. 이 장면을 보고 당시 문재인 대선후보가 눈물을 흘렸다던가.

그래서 그런지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가 강대국에 둘러싸인 광해의 그때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미국에 가서 설득해야 하고 중국의 심사를 걱정해야 하고 그리고 북쪽 지도자에게는 믿고 함께 가자고 호소한다. 광해는 실패했지만, 우리 외교는 꼭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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