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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진. 공룡 IT기업 네이버의 창립자.

1999년 6월 네이버컴을 설립했다. 2000년 7월 김범수의 한게임과 합병 후 NHN(Naver&Hangame Network)의 공동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2013년 8월 게임 사업 부분을 다시 NHN 엔터테인먼트로 분리한 뒤 네이버 이사회 의장직에 앉았다. 2013년 4월에는 라인의 회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2017년 3월, 네이버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고 글로벌투자책임자인 GIO(Global Investment Officer)로 활동하고 있다. 

언론에 잘 나타나지 않아 '은둔형 경영자'로 불린다. 하지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사업 전략을 짜느라 동분서주한다고 한다. 그는 대외적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별도로 뒀다. 서비스, 사업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네이버는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 중 유일하게 자수성가한 기업이다. 그 초석을 다진 사람이 바로 이해진이다. 이해진은 매우 꼼꼼하고, 몰입을 중시하며, 안주하는 것을 경계하고, 일에 있어 '프로다움'을 중시했다. 

2012년 이해진은 사내 강연을 통해 사내 "게시판에서 삼성에서 일하다가 편하게 지내려고 네이버로 왔다는 글을 봤다.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다"면서 "회사는 조기축구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훗날 그는 이 발언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IT 산업은 끊임없이 급변하는 곳이다. 그 강대한 싸이월드가 망하고, 노키아가 망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절대 안주하면 안 된다. 매년 다시 태어나야 하고 혁신해야 한다. 조기축구 동호회는 져도 되지만, 프로축구단은 절대 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프로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말이다. 네이버가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해진의 '프로다움' 신조다. 

그렇게 쌓아올린 것이 네이버다. 네이버는 항해하다(Navigate)와 -하는 사람(er)를 합친 것을 의미한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항해하는 사람이다. 이해진도 비슷하다. 그는 한국 IT 산업의 최전선에서 항해해왔다. 이제는 글로벌 시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의 주변 인물 6명을 통해 그가 항해해온 뱃길을 따라가 보자. 

김상조 

현 공정거래위원장. 네이버를 2017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하고 이해진을 총수로 지정했다. 

김상조와 이해진은 '관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그저 공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상조는 '총수' 지정으로 이해진의 경영인생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이해진은 자신이 지분 100%를 가진 개인회사와 친족이 지배하는 회사 등에 공정거래법상 총수일가 부당이익 제공 금지 규제를 받게 됐다. 

지난해 공정위와 네이버는 이해진의 네이버 총수 지정을 두고 설왕설래했다. 2017년 8월 이해진은 공정위를 방문해 네이버의 총수를 자신이 아닌 네이버 법인으로 해달라 요청했다. 네이버는 창업자 지분이 낮고, 친인척 지분이나 계열사 간 순환출자가 없으며, 전문경영인이 있고 이사회 중심으로 경영체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타 재벌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이해진은 네이버 지분 4.31%를 갖고 있었다. 타 재벌 총수에 비해 상당히 낮은 지분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위는 국민연금과 해외기관투자자를 제외하면 최다출자자이고, 소액투자자가 많아 사실상 지배력 행사에 있어 유의미하다며 이해진을 총수로 지정했다. 김상조는 이해진 총수 지정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김상조는 언론 인터뷰에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비교하며 이해진이 미래를 보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네이버 정도 되는 큰 기업이 됐으면 확고한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란이 일자 김상조는 사과했다. 

네이버

이해진이 평생을 바쳐 일군 회사. 삼성SDS의 사내 벤처기업이었던 네이버가 시가총액 23.6조 원, 코스피 기준 시총 10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구글과 유튜브에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내 최정상의 포털사업자다. 

이해진은 1997년 삼성SDS의 사내 벤처로 네이버를 시작했다. 1999년 6월 삼성 SDS에서 독립해 네이버컴으로 분사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인터넷업계는 포화상태였다. 이해진이 선택한 것은 정공법. 이해진은 인터넷 사용자들은 한 번 사용해보고 불편하거나 비싸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갈아탄다는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술력과 서비스 품질로 승부했다. 네이버는 점점 인지도를 쌓아가며 2001년 야후를 거의 따라잡고, 다음을 턱 끝까지 추격했다. 

2000년, 한게임과 네이버는 회사를 합병했다. 한게임은 회원 수를 천만 명 가까이 끌어모아 수익성이 탄탄했지만, 인터넷으로 사행산업을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네이버는 사용자들을 오래 머무르도록 하는 커뮤니티가 없었다. 이해진은 이 둘의 합병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봤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NHN(NaverHangameNetwork)다. 이해진과 김범수의 눈은 정확했다. 이후 NHN은 포털 1위였던 다음을 제치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네이버가 성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2002년 지식iN 서비스다. 지식iN은 한 네티즌이 질문 글을 올리면 다른 네티즌이 답을 달아주는 형식인데,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트래픽을 끌어모으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검색광고 서비스를 출시하고, 메일, 블로그, 카페 등 신규 서비스도 승승장구해 2005년, 포털 부동의 1위에 올라서게 됐다. 서비스 측면에서 성장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것은 한게임 기반의 게임 서비스가 탄탄한 수익성을 뒷받침 해 준 덕이라는 업계의 평이다.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후 한동안 정체 시기가 왔던 네이버를 크게 성장시킨 것은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다. 카카오톡이 이미 국내 시장을 선점해 국내에서 네이버 메신저 성공 확률은 희박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해진은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통신이 끊기자 인터넷 서비스가 새로운 연락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라인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했고, 라인 개발을 적극 주도했다. 라인은 2011년 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2년 만에 약 3억 명의 가입자를 돌파할 정도로 성공했다. 

이해진은 네이버의 서비스 개발과 사업 전략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온 이유로 자신이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에 외부 및 운영업무에 취약해 선배들의 조언을 따른 것이라 밝혔다. 이에 그는 현재 국내 사업을 '네이버 서비스 전문가' 한성숙 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유럽, 일본 등 해외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이사 사장. 이해진 '판박이'로 불린다. 

1989년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민컴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4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고, 94년에 나눔기술 홍보팀 팀장을 1년 동안 맡았다. 1996년에 다시 PC라인 기자로 복귀하고 1년 뒤, 1997년 엠파스 검색사업본부 본부장이 됐다.

2006년 10월 엠파스 창업자 박석봉 대표가 SK커뮤니케이션즈(네이트)에 매각. 합병을 하면서 합병 반대 입장을 가졌던 자신이 퇴사했다. 한성숙은 NHN에 2007년 검색품질센터 이사로 입사했다. 꼼꼼한 성격, 냉철한 분석 등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해 2017년 네이버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해진과 한성숙은 비슷한 면이 많다. '프로'와 '열정'을 중시하는 이해진처럼 한성숙도 엄청난 열정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성과를 낸다. 웹툰, 웹소설, 한류 스타의 인터넷 방송 브이라이브, 네이버페이 등 한성숙의 손을 거쳐간 모바일 플랫폼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능력 중심주의 이해진이 한성숙을 사장으로 점찍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성숙과 친분이 있는 IT업계 관계자는 "한성숙의 성공은 그가 하드 워커(Hard Worker)이기 때문이다. 그가 쉬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러한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그가 수많은 사업을 성공시키고 네이버 사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라 말했다.

네이버는 한성숙이 대표로 내정됐을 당시 "한 대표 내정자가 사용자의 작은 목소리와 서비스 구석구석까지 살피는 섬세함, 시장의 흐름을 읽어 서비스로 빠르게 엮어내는 과감한 실행력으로 네이버의 변화를 주도해 왔다"고 평가했다.

한성숙이 국내 사업을 든든히 맡아주면, 이해진이 글로벌 사업 및 투자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둘의 시너지가 상당히 좋다고 볼 수 있다. 이해진은 한성숙에 대표이사 사장을 맡기고, 글로벌투자책임(GIO) 으로 물러나면서 해외 시장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준호 

NHN엔터테인먼트 회장이다. '검색엔진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준호는 이해진의 서울대 3년 선배다. 이해진은 검색서비스를 강화하고자 이준호에게 함께 일하자 제안했다. 이해진은 이준호에 10억 투자와 일정 금액의 연구비를 주겠다 약속했다. 이준호는 이를 받아들이고 2000년 검색전문업체 '서치솔루션'을 창업했다. 이후 네이버와 협업하며 검색솔루션을 개발했다. 이후 네이버가 주식교환 방식으로 서치솔루션을 인수해 이준호는 네이버의 주주가 됐다. 

2005년 이준호는 최고기술자(CTO)로 NHN에 들어와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2007년 경영총괄(CAO), 2009년 최고운영책임자(COO)까지 맡아 NHN 경영 전반을 담당했다. 

2007년 김범수가 대표이사직에서 사임하고 이준호가 NO.2로 올라가면서 이해진과의 파워게임이 본격화됐다. 이미 검색 파트와 게임 파트로 정치화된 상태에서 두 사람의 지분마저 3~4%대로 비슷했다. 이준호가 개발조직, 인사, 운영 등 경영의 상당한 부분에 영향력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임원 '라인'까지 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워게임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다 2013년 8월, NHN엔터테인먼트(한게임)와 네이버가 인적분할했다. 당시 지주사 체제로 가는가, 아니면 두 사람이 완전히 이별하는가 등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결국, 두 회사는 완전히 결별한다. 2014년 9월, 네이버가 NHN엔터의 지분을 전량 이준호에 팔았고, 이해진도 1%를 제외한 나머지 지분 3.64%를 넘겼다. 이준호도 네이버 주식을 꾸준히 팔면서 진짜 남남이 됐다. 

현재는 NHN엔터의 간편결제서비스 '페이코'와 네이버 '네이버페이', NHN엔터 음원서비스 '벅스'와 네이버 '바이브' 등 여러 사업 영역에서 경쟁 중이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한게임 창업자이며, NHN의 공동대표이사였다. 현재는 카카오의 이사회 회장. 

이해진과 학창시절부터 함께한 IT 동료다. 서울대학교에 1986년 함께 입학해 1990년 졸업했다. 김범수는 서울대, 이해진은 카이스트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이들은 2년 후인 1992년 삼성SDS에서 다시 만났다. 이후 김범수는 1998년 '한게임'을, 이해진은 1999년 네이버컴을 창업했다. 

한게임과 네이버는 2000년에 합병했다. 7년 뒤인 2007년, 김범수는 NHN 대표에서 사임하면서 오랜 시간 함께했던 이해진과 김범수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당시 김범수와 이해진의 갈등설이 돌기도 했다. 김범수는 그가 창업한 포도트리 기자간담회에서 "이해진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 한계를 느꼈다"며 사임 이유를 밝혔다. 

결국 김범수는 네이버에 대적할만한 무기를 가지고 다시 이해진 앞에 서게 된다.  김범수는 새로운 벤처회사 '아이위랩'을 만들고, 지금은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앱 '카카오톡'을 2010년부터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은 스마트폰 열풍을 타고 무섭게 성장해 누구나 쓰는 '국민 앱'이 됐다. 

카카오톡은 대한민국 누구나 쓸만큼 대중화됐지만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콘텐츠 플랫폼을 표방했으나 예상보다 실적이 부실했고, 네이버의 '라인'이 해외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카카오톡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이에 성장 동력을 만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다음'이었다. 결국 2014년, 카카오톡과 다음 두 IT기업이 합병하고 김범수는 카카오의 최대주주로 올랐다.

플랫폼 양대산맥이 된 네이버와 카카오는 검색, 간편결제, 이커머스, 메신저 등 비슷한 사업영역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는 라이벌이 됐다. 김범수와 이해진도 마찬가지다. 한때 한솥밥 먹는 식구였지만, 지금은 경쟁자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 현 카쉐어링 업체 '쏘카'의 대표이사. 

이해진과는 친구 사이로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어머니끼리  친한 사이라고도 전해진다. 이해진이 그렇게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던 다음을 창업한 창업자다. 이재웅은 연세대학교 졸업 후, 프랑스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유학을 다녀오고 난 뒤인 1995년, 이택경, 故박건희와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다음은 1997년 시작한 한메일로 대박을 치고, 1999년에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다음 카페를 선보였다. 2000년대 초반, 다음은 업계 1위였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서히 사용자를 잃다가 2005년 네이버에 포털 1위를 내어주고 만다. 그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온라인 우표제'와 네이버의 '지식iN'서비스, 네이버의 카페, 블로그 개설을 당시 다음 카페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간과한 것이 꼽힌다.

다음은 쏟아지는 스팸메일로 불편함을 겪는 이용자를 위해 '온라인 우표제'를 2002년 시작했다.  업체가 한메일 수신자에게 총 1,000통 이상 발송 시 1통 당 10원이 나가는 이메일 유료화 정책이다. 스팸메일도 잡고 유료화도 가능해 보이는 모델이지만, 다음에게 이는 '최악의 수'였다. 한메일 주소를 가진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야 하는 업체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회원 가입 때 '@hanmail.net'을 입력하지 말라는 권고까지 하게 됐다. 

불편을 느낀 이용자들이  네이버 메일로 갈아타고, 네이버가 '지식iN'서비스를 내놓으면서 네이버는 2005년 포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다음은 '만년 2위'가 되어 설움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카카오와 한몸이 되어 네이버와의 전 분야에서 전투중에 있다. 

이재웅은 다음이 고전을 면치 못하던 2007년 전문경영인에 회사를 맡기고 다음 대표이사직을 내려놨다. 카카오와의 합병 이후에는 경영에서 완전히 손 뗐다. 현재는 '쏘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해 김상조가 이해진에 "잡스처럼 비전 제시 못했다"고 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재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상조 위원장이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정부 도움 하나도 없이 한국과 일본 최고의 인터넷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글을 올렸다. 

이재웅은 당시 이해진과 친구인 것을 떠나 원래 갖고 있었던 소신을 밝힌 것일 뿐이라 말했다. 그는 이해진과 같은 혁신기업인들의 기업지배구조개선을 위한 노력이 좀 더 인정을 받고, 설혹 실패를 하더라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이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Who's Next?

네이버만 공격하지 말고 구글이 가져가는 이익도 조명해야 한다며 형평성을 맞춰달라 주장한 이해진과 같이 이케아와 신세계의 규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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