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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거장의 풍모로 다시 우리 앞에 돌아왔다. 영화라는 매체는 이미 엄청난 자본과 투자를 필요로 하는 상품이 되었다. 하여 영화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일관되고 줄기차게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수지와 타산을 맞추기 위해선 상업적인 타협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창동 감독은 영화가 여전히 클래식한 무엇이며 아련함을 주는 창작물임을 환기시켜주는 귀한 사람이다. 이 척박한 시대에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를 거장이라 부르는데 인색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영화 버닝이 칸느 영화제에서 기대했던 그랑프리를 못 받았고 천만 영화의 흥행 금자탑에 오르지 못했지만, 영화제에 모인 사람들의 기립 박수와 영화팬들이 보여준 열화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만큼 영화 버닝이 담고 있는 메시지나 울림은 요즘 극장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화완 많이 달랐다.
잘 알려진 대로 영화는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물론 하루키가 소설에 담고 있는 몽환의 색채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색 과정에서 이창동의 리얼리즘으로 변색되었다. 

택배 회사에서 알바를 하는 종수(유아인)는 문학창작과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소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현 MBC 최승호 사장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었지만 나름 표정 연기?는 괜찮았다. 근데 그는 무슨 맘으로 출연한 걸까?)는 공무원과 시비가 붙어 현재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고,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는 몇 십 년 만에 만나 하는 말이 고작 돈을 꿔 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소설을 쓰겠다고 하지만 아직 변변한 작품도 없고 등단도 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지리멸렬함 속에 우연히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게 되고 불현듯 그녀와 섹스를 하게 된다. 아프리카 여행을 가게 된 그녀는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포르쉐를 몰며 반포에 럭셔리한 룸을 가지고 있고 근사한 친구들을 불러 우아한 파티를 열곤 하는 벤은 종수가 보기엔 “대체 그 나이에 어떡해서 이렇게 돈을 벌었지?” 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벤은 비닐하우스를 보면 불을 지르고 싶단다. 마치 눈에 거슬리는 흉측한 물건을 불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종수는 벤에 대해 어떤 몹쓸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해미가 실종되면서 영화는 마치 미스터리 영화처럼 어지럽혀지고 메타포가 난무하게 된다. 자칫 벤이 연쇄 살인마 인가? 아니면 종수와 벤을 통해 계급갈등, 부의 양극화 따위를 얘기하고 싶은 걸까? 이렇게 단순 논리로 영화를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이창동의 속내는 그렇치 않다. 그냥 지금, 이 시대(신자유주의든 천민자본주의든 그도 아니면 불확실성의 어떤 시간대이든)의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나 자기 삶에 대한 생각이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감독은 말한다.

종수는 해미가 부탁한 고양이의 먹이를 주기 위해 아무도 없는 해미의 원룸 자취방을 정기적으로 들렸다. 그곳에서 종수는 남산을 바라보며 해미의 체취를 동력으로 격렬한 수음을 한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다가 오곤 했다. 모든 것이 불가해하고 무기력한 청춘을 거장은 어설픈 위로나 위안 대신에 현미경과 망원경을 써가며 아슬아슬한 희망 혹은 절망을 내놓는다. 그것을 알아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 젊음은 위로 받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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