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시장이 형성된 시기에 대한 분명한 자료는 없지만 부족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 자연스럽게 출현했을 것이다. 인류 최고(最古)의 수메르 문명이 만개했던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들은 점토판에 문자로 기록을 남길 정도로 개화되어 있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체계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던 시장이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시장의 본질은 상호 이익이 되는 거래에 있다. 거래란 본질적으로 자신이 보유한 것과 다른 사람이 보유한 것을 교환하는 행위다. 따라서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비하고 남는 잉여가 존재해야 한다.

지금부터 약 1만2,000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잉여 농산물을 저장하고 가축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전의 수렵·채집 시대에는 잉여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농산물을 비축하고 가축에서 얻은 고기와 젖 등을 저장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거대한 진보인 동시에 새로운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장의 복잡한 속성은 이와 같이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bal N. Harari)가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이자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렇지만 농업혁명이 인류에 미친 영향은 긍정 또는 부정의 관점에서 이분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선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농업혁명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이란 소비하고 남는 잉여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거래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마당이다. 이런 의미에서 농업혁명 이후 시장이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반면 경제적 잉여는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갈등과 투쟁의 원천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시장은 처음부터 애증(愛憎)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탄생했다.

시장은 오랫동안 비교적 작은 규모로 존속했으며 거래 대상도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다. 서양의 경우 중세 봉건 시스템에서는 자급자족이 기본이었기에 시장은 사회공동체의 작은 일부로서 근근이 맥을 이어왔다. 시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발달했지만 시장경제로 진화한 것은 서양이 먼저였다. 시장경제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도 만연한 동서양의 격차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바탕으로 하는 생산방식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시장경제는 상호 의존적인 여러 개별 시장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거래에 기초하고 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므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경제는 300여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과학혁명에 기반을 둔 기술혁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경이로운 발전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다. 지금 인류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가 시장경제의 진화 과정을 통해 성취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시장경제는 특유의 역동적인 적응력을 발휘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시장경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장(場)이다. 모든 종류의 장―예컨대 중력장이나 전자기장 등―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으며 시장경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시장에서 작용하는 힘은 가격을 통해 전달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경제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장경제의 표준 모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완전경쟁(perfect competition)이 지배하고 완전정보(perfect information)가 갖춰진 시장경제가 가장 이상적인 표준 모형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이런 시장경제는 유토피아, 즉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일 뿐이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불완전경쟁과 불완전정보가 지배하는 매우 취약한 시스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장경제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이유는 가격 시스템(price system)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가격 시스템이란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상품들의 가격을 망라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는 환율, 이자율, 임금, 에너지 가격, 주가 등 우리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가격들이 포함되어 있다. 시장경제는 이런 가격 시스템을 이용해 각종 자원을 배분하고, 소득을 분배하며, 나아가 다양한 정보를 집계해 시장참여자들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가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시장경제는 총체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가격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가격 시스템의 역할을 위협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정부 개입과 독과점을 들 수 있다. 정부는 때때로 가격 결정 과정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최저임금도 이런 개입의 일종이다. 이것은 가격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런 개입을 시도할 때는 효율과 평등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최저임금이 적절한 속도와 방법을 통해 추진되는 경우에는 효율과 평등 간에 상보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추진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가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은 독과점에 의한 가격 통제(price control)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강조했던 시장의 미덕은 오늘날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이 담당하고 있는 영세한 사업 분야에만 적용된다. 반면 기업집단이라 불리는 재벌 산하의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 시장은 대부분 독과점인 것이 현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나라마다 상황이 조금씩 다를 뿐 대동소이하다. 미국의 경우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 초국적기업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독과점 기업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것은 독일, 일본 등 다른 선진국으로 확대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예컨대 울리케 헤르만이라는 독일의 저널리스트는 저서 『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에서 독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대 기업연합은 100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장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일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은 거의 모두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생겨났다.......이렇듯 선도적인 주식회사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거대 기업들을 뚫고 들어올 업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철강, 자동차, 화학 혹은 제약 분야의 시장은 신생 기업이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꽉 잠겨있다.”  

독일의 경우 독과점기업들에 의한 시장지배가 이 정도라면 우리 상황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장경제를 포기하고 혁명적으로 독과점기업을 해체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암울하다는 데 있다. 독과점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비중이 계속 커진다면 가격 시스템의 기능은 더욱 왜곡될 것이고, 이는 시장경제의 장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은 독과점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보기술은 승자독식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만 살아남고 2등은 몰락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곧 독과점이 더욱 강화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가격 시스템의 기능이 점점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전망을 피할 방법은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플 아마존 또는 삼성전자의 자비심에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는가?  이들 초국적기업들이 소비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회 안정을 위해 적절한 이윤만을 남기면서 가격을 책정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이런 우호적인 가격 정책을 기대할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들 기업이 목표를 기존의 주주가치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가치극대화로 바꾼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이들 기업이 이 방향으로 목표를 선회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기존의 군림하던 정부가 국민들의 복지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스마트한 정부로 변신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시민들이 각성해 기업이 변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시민들이 제대로 된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스마트한 정부와 스마트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로 발전해 나간다면 기업 스스로 이해관계자가치극대화라는 목표로 선회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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