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minzada

노회찬. 진보정당의 얼굴이자 살아있는 역사,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살아있는 역사가 아닌 역사가 되어버린 인물.

그가 대한민국 진보의 얼굴로 살아온 수십년의 인생 동안 꿔온 꿈은 무엇일까. 노회찬은 2010년 출판된 '진보의 재탄생'이라는 책의 서문,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에서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앞서 노회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이후에도 광주 유혈진압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큰 좌절 앞에서 자신의 인생 대부분이 겨울의 연속일 것이라 확신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더디게 올 것만 같았던 독재의 끝도 마침내 찾아왔고,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날은 평생 구경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살아생전 목격하게 되었다. 또 그의 일생 대부분을 바쳐온 진보정당건설에서도 '꿈에서 나와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를 무던히 들었지만 끝끝내 진보정당이 창당되고 두 자리 수 원내 의석까지 확보하게 됐던 날들이 왔다. 이 날들을 언급하며 자신이 꾸는 꿈 역시 요원할 것 같지만 끝내는 이뤄질 것을 믿노라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경기고 시절부터 이미 사회과학 공부모임을 조직하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 그는 고려대 졸업 이후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으로 노동자로 살게 된다.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노조를 조직해 민주화 운동을 하는 등,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그. 국회의원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아닌, 노동자를 대변하는 의원이 되기 위해 정치의 길로도 들어서게 됐다.

이후 노회찬 그 자체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가 되어버린다. 한국 진보사의 족적 자체인 고(故) 노회찬의 6인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생을 돌이켜본다.

원태순

노회찬의 노모이자 아들의 영원한 지지자이다. 노회찬은 세상을 등지게 된 날 마지막으로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했다.

1956년 부산 초량 산동네에서 태어난 노회찬. 그의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고, 부산에서 어머니 원태순 씨를 만나 슬하에 세 자녀를 낳아 길렀다.

노회찬의 부모는 가난했으나 그 시절 드문 문화 애호가였다. 1950년대 말 부부가 함께 부산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러 갈 정도였다. 그 문화적 취향은 고스란히 아들, 노회찬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주며 "이제 아이가 아니니 이걸 들어야 한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라며 첼로를 쥐어주었다. 노회찬의 영원한 꿈,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는 이런 부모로부터 내려온 유산이다.

또 원태순 씨는 공부를 제법 잘 하던 아들이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서도 이를 만류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신문에 난 노동문제에 대한 기사를 모아 전해줄 정도로 아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 열성적이었다. 아들이 교도소에 수감 중일 적에는 그 교도소 마당에 떨어진 낙엽마저 소중하게 가져와 책 속에 넣어두었으며, 아들의 수의번호 336번을 써놓고 분재를 키워 '이 나무가 안 죽어야 아들이 살아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길렀다. 그리고 말 없는 기도로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소양이 있었던 부모 밑에 자란 노회찬이 진보의 상징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무조건 굴복하지 않으며 부당한 것에 항거할 줄 알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의 소양은 창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 토양에서 자란 노회찬은 중학교 때부터 부당한 일이 생기면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대들었고 재수를 해서 서울까지 유학을 가 진학하게 된 경기고등학교에서도 '중국공산당사', '창작과 비평', '사상계'를 읽게 된다. 그 결과, 고등학교 시절 이미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 시절, 평생을 암흑 속 노동운동가로서 살기로 결심하고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딴다. 고려대 졸업식과 직업학교 졸업식이 겹친 날, 그는 당연히 후자의 날로 향했다.  

김지선

노희찬의 아내. 1985년 처음 만나 1987년부터 연애를 시작해 1988년 결혼을 했다. 노회찬보다 연상인 김지선은 노회찬 못지 않은 노동운동가로, 그 시절 여성으로서 노동 운동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독신주의자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노회찬의 두 번의 프러포즈 끝에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결혼 서른 중반 나이로 당시로서는 꽤 늦은 결혼이었다.

지난 2013년 남편 노회찬의 지역구였던 노원병 보궐선거에 진보정의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 김지선은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나보다 먼저 한 것은 국회의원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다. 김지선은 노동 운동에 있어서는 노회찬보다 더 일찍 활동했고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소청도에서 태어나 경제적 여건 탓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그야말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대성목재에 취직을 하게 된 그는 노동운동에 눈을 뜬 다음 파란만장한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83년 인천블랙리스트 사건 등을 비롯해 구속 전력도 있으며,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사무국장,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등을 지내온 그를 80년대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은 '누님'이라 불렀다.

노회찬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숱하게 김지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 때마다 인간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끌렸었다고. 그 끌림으로 노회찬 인생 최초로 지인에게 소개를 부탁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대뜸 청혼을 해버렸다. 당연히 거절 당한 노회찬. 하지만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편지를 보낸 끝에 자연스레 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결혼에도 골인하게 된다.

김지선은 한국 여성 운동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여성으로서 노동운동을 한 그가 여성 운동에도 일생을 바친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성의 전화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노동문제 속 여성과 연관된 사안에 대해서도 의식을 갖고 활동해왔다 .이런 김지선의 영향을 받아 노회찬 역시도 한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된다.

노회찬은 17대 국회의원이었던 2005년부터 14년 동안 매년 3·8 세계 여성의 날에 여성들이 장미꽃을 선물해왔다. "권력의 힘으로 강제된 성적 억압과 착취가 침묵과 굴종의 세월을 헤치고 터져 나오는 현실을 보며 정치인으로서, 한 여성의 아들이자 또 다른 여성의 동반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라는 내용의 편지도 곁들이면서 말이다. 그가 처음으로 대표발의를 한 법안 역시도 호주제 폐지. 2005년 3월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여성계가 노회찬에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매일노동뉴스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노회찬을 빚더미에 앉게 만든, 그러나 그 인생의 큰 과업 중 하나인 신문이다.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의 초대 발행인이자 대표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이 신문을 이끌어왔다.

신문을 발행하는데 드는 돈을 생각하면 사실 매일노동뉴스는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동지가 낸 일간지 발행의 의견을 노회찬이 적극적으로 도와 1993년 5월 18일 마침내 지면으로 빛을 보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노회찬의 희생도 상당했다. 그가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매일노동뉴스를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진 빚 탓에 카드 돌려막기 까지 했었다고. 이에 국회의원이 되고 은행에서 가장 좋은 카드를 발급해주겠다며 찾아 왔지만 다음 날 바로 '카드발급 대상이 아니다'라고 연락이 온 일화도 있다.

매일노동뉴스에 따르면, 그의 운구차량이 생전 그토록 아꼈던 매일노동뉴스의 사옥에도 잠시 들르도록 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뒤에도 "몸만 떠났을 뿐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라고 말해온 노회찬. 그가 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우리 사회의 판을 갈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낡은 카르텔의 판을 갈기 위해서는 진보 스스로가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권 동창회를 탈피해 대중정당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외연을 확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전문가 집단의 대대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진보의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방법으로 매일노동뉴스를 바라봤을 것이다.
 

심상정

노회찬과 더불어 진보정당의 얼굴로 꼽히는 인물. 노회찬과는 바늘과 실과 같은 사이로, 부부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가깝다. 둘의 인연은 노동운동 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심상정의 남편과 노회찬도 경기고 선후배 사이로 가깝다.

서울대 사범대 78학번의 심상정은 스커트와 하이힐로 멋을 부리며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던 중 운동권 세계를 알아야 겠다며 이에 발을 들인다. 이후 그녀는 남성 중심 운동권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서울대 최초 총여학생회 창설을 주도한다. 초대 총 여학생회 회장을 하기도 했다.

심상정이 노동계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1980년대. 위장취업으로 구로공단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그는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며 이름을 알렸다. 9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고, 여러 노동단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도 생긴다. 지난 19대 대선에 출마해 6.2%라는 진보정당 역대 최대 득표율을 얻어낸 그를 노회찬은 진보정당 최초의 대통령으로 탄생할 만한 동지이자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상정과 노회찬은 나란히 진보정당 최초의 3선의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정당의 얼굴이 된 두 사람은 굴곡의 길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만큼 진보정당의 건설은 가시밭길이었다. 노회찬 스스로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한 노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 같아 소름 돋는다 했다. 그 길을 자주 심상정과 함께 걸었던 노회찬이다.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 자체가 꿈이었던 적도, 또 두 자리 수 원내 의석 확보 자체가 요원한 꿈이었던 적도 있지만 이를 다 이뤄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남은 정치적 소망 하나는 최초의 진보정당 출신 대통령 아닐까.

그 꿈을 이뤄내기 위해 사실 노회찬은 자주 심상정의 정치 행보 앞에 나름의 희생을 하기도 했다. 진보정치를 위해 자신보다 심상정을 앞세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 욕심을 내지 않고 한 발 물러서 늘 심상정을 응원해왔다. 운동권 시절, 명동성당으로 도주하던 중 자신보다 달리기가 빠른 심상정에 분해했었다는 노회찬이지만 이미 그 시절 자신보다 공격적이었던 심상정의 역할을 알아보았을 그이다. 

그 스스로 "진보정치의 한 꿈을 꾼 동지"라 표현한 심상정이 고인의 뜻을 받아 마지막 꿈을 마침내 이뤄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유시민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자 작가, 방송인. 스스로 '진보 어용 지식인'이라 칭하는 유시민은 노회찬과 각별한 사이였다.

노회찬과 유시민, 그리고 심상정은 PD계열(민중 민주파)의 절친한 3인방으로도 유명하다. 진보신당을 함께 창당한 운동시절부터 정치인 시절까지 온 마음을 함께 나눈 동무다. 그러나 심상정과 노회찬이 서로를 아끼는 동지였다면, 유시민과 노회찬은 같은 PD 계열 내에서도 그 색이 달라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친했던 두 사람. 2012년 정의당의 전신인 진보정의당을 함께 창당했고 팟캐스트도 함께 진행하며 국내 진보의 살을 찌워왔다.

노회찬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오열한 유시민. 추도식에서 "아시죠? 형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는 것을요"라며 처음으로 그를 형이라고 불러본다라며 애달파했다. 늘 형으로 여겼으나 단 한 번도 형이라 불러보지 못한 유시민의 노회찬.

그리고 유시민의 눈물을 본 대중은 자연스럽게 노회찬의 죽음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정치적 동반자이자 절친한 동지들을 차례로 잃고 만 유시민. 노무현의 죽음을 뒤로하고 정치의 지독한 운명을 알았던 그는 정치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지난 6월에는 그가 정의당마저 탈당한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정치와 더 멀어지고 싶어서' 였다. 그러면서 지난 6월 수년간 진행해 온 정치 예능프로그램 '썰전'마저도 하차했고, 그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 공교롭게도 바로 노회찬이었다.

이제 그의 또 다른 동지, 노회찬 마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정치를 떠난 유시민. 노회찬의 죽음 이후 어떤 반전은 일어나게 될까. 
 

드루킹

노회찬을 죽음으로 몬 2018년 한국 정치계의 가장 뜨거운 인물.

친노 친문 파워블로거이자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대표 김동원의 필명이 바로 드루킹이다. 그는 인터넷 등에서 여론조작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네이버 등 포털의 기사 댓글에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현 정부를 비방하는 여론조작 활동을 한 사실이 적발되었고, 이에 앞서 19대 대선 전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및 옹호를 위한 조직적인 여론조작을 했다는 혐의 역시 받고 있다.

특검까지 꾸려진 드루킹 사태에 대해, 노회찬에 드루킹이 5,000만원의 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세간이 전해졌다. 이를 부인해 온 노회찬은 지난 7월 23일 결국 유서에 해당 내용에 대해 언급했고 세상을 등졌다. 노회찬의 유서에는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4000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두고 삼성X파일의 떡값검사들 실명을 공개해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늘 우리 사회의 부패를 들춰내온 노회찬이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기에 비극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둘의 인연. 그리고 현재 드루킹을 수사하는 특검의 칼 끝은 김경수 경남지사를 향하고 있다.

 

Who's Next?
노회찬이 유시민과 함께 진행한 팟캐스트 저공비행의 첫 주제였던 SK 그룹 최태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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