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픽사베이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의 마법사로 불린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인으로 태어난 그는 1884년 28세 나이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민자 출신 과학자다. 26세 나이에 프랑스 파리의 에디슨 컴퍼니에서 일하면서 교류 전기 모터의 시제품을 개발한 뒤, 뉴욕으로 가 자신이 동경하던 에디슨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디슨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직류 전기를 활용한 전등의 발명가 에디슨은 교류 전기 모터가 ‘시간 낭비’라고 일축했고, 좌절한 테슬라는 독립을 택하지만 이후 자금난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테슬라에게 기회를 준 사람은 22세에 열차의 공기 브레이크 개발로 대박을 올렸던 조지 웨스팅하우스였다. 자신의 발명품을 시장에 내놓아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던 그는 테슬라의 특허를 사들인 뒤 전기 교류 모터를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3년 후인 1891년. 테슬라는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전기의 마법을 선보였다.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드는 테슬라코일과, 최초로 선보인 형광등의 시제품은 모든 사람을 경악케 했다. 실제 자신의 몸에 고전압을 흘려 보내 마치 아이언맨에 전기후광이 비추는 듯한 모습까지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들은 테슬라가 선보인 전기관을 ‘정의의 대천사가 손에 쥔 빛나는 관’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895년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 전기를 만드는 수력발전소를 수주하면서 테슬라는 에디슨을 넘어서는 천재 과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테슬라의 유명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뉴욕 롱아일랜드 지역에 테슬라 타워를 세워 전기를 전 세계로 내보내는 무선통신의 상상을 실험했다. 하지만 전기를 전세계 무한에너지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테슬라 타워가 진동하자 화성에서 신호를 받았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악화됐다. 테슬라가 어렵게 15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던 금융계 거물 JP모간은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무선통신에 성공하던 시점, 테슬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중단했다. 테슬라가 실패한 과정과 원인을 놓고 후대까지 무수히 많은 논란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는 교류 전기 모터를 발명하면서 냉장고, 에어컨, 라디오, 레이더를 만들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현 세대가 애용하고 있는 무선 데이터통신의 원형을 상상하고 시도한 사람도 테슬라가 최초였다.

1943년. 미국 대법원은 마르코니가 발명한 무선기기의 특허를 마르코니가 아닌 테슬라의 소유로 판결 내렸다. 라디오의 아버지는 마르코니가 아니라 테슬라임이 공식적으로 인정됐지만, 때는 그가 죽은지 6개월 후였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법인 테슬라는 전기차의 상용화를 직접 실현한 선도적 기업이다. 그가 창업한 회사는 아니지만 일찌감치 투자자로 참여한 뒤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과학자 테슬라가 교류 전기 확산을 위해 교류 전기 특허권을 포기했던 것처럼, 기업 테슬라도 2014년 전기차 시장의 확대를 위해 전기차 특허를 모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결정한 사업의 방향은 인터넷, 우주, 해저터널, 태양광과 친환경 에너지 등으로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상상하고 시도했던 전세계적인 소통과 흡사하다. 화성과의 교신을 시도하던 과학자 테슬라처럼, 일론 머스크는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를 통해 화성으로의 식민지 개척을 실험하고 있다.

이런 테슬라의 경영환경이 요즘 힘들다고 한다. 고위 경영진들이 무더기로 이탈하고, 모델 3의 출시와 생산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수차례 사고를 내면서 개발과 양산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해졌고, 투자기관들의 우려 속에서 손실은 늘고 주가는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사람들은 비운의 ‘괴짜’ 과학자 테슬라를 말할 때 ‘풍부한 상상력의 배신’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21세기 대표적 ‘괴짜’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의 상상력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과학자 테슬라에게 투자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나 JP모간이 현존한다면, 법인 테슬라에도 투자를 계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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