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변호인. 네이버 무비

한국의 어머니상을 가장 잘 표현했던 배우는 누구일까? 많은 훌륭한 배우가 있지만 김혜자 씨가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 같다.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언제든 돌아올 자식을 기다리고 있을, 전쟁 같은 삶에 지쳐 대청마루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말없이 와서 안아 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분이다.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전원일기에서 포근한 어머니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주더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는 아들에게 집착하여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는 독한 어머니 역할까지 폭넓은 어머니를 연기하였다.

또 한 분을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안타깝게 고인이 된 김영애 씨다. 김혜자와는 다른 결을 가진 어머니 역할을 많이 맡았었다. 한과 아픔이 서려 있는, 운명에 순응하지만, 자식만은 그 운명이 비켜날 수 있다면 목숨까지 바쳤던 비장한 어머니의 모습을 TV나 영화를 통해 봐 왔다. 

먼저 기억나는 작품은 TV 드라마 ‘모래시계’다. 빨치산의 아내이자 유복자인 태수(최민수)의 어머니로 분한 김영애는(사실 그 당시에 어머니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드라마 1회만 등장하고도 시청자를 확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는 기생집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아들을 잘 키워냈다. 그러나 태수는 육사에 합격하고도 연좌제에 걸려 합격이 취소되고, 낙담한 어머니는 빨치산 남편을 묻은 지리산 자락에 올라 술을 뿌리고 내려오다 그만 기차에 치여 죽는다. 아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 자살한 것으로도 읽히는 장면이다. 사고 나기 얼마 전, 태수를 앞에 두고 소반상에 술을 자작하며 아들에게 못난 어미의 용서를 비는 장면은 다시 봐도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절창의 연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김영애는 밝고 빛나는 어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역할을 도맡았다. 배우 최강희와 콤비를 이루며 관객들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었던 영화 ‘애자’에서 시한부 엄마 역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에서는 구속학생 어머니 역을 눈물 나게 재현했다. 부산의 세무전문 속물 변호사인 송변(송강호)이 시국사건을 맡으면서 확 사람이 바뀌는 배경에는 어머니 김영애의 한 마디가 있었다.

“변호사님아…. 우리 아들 좀 살려 줘.”

단골 국밥집 최순애 아줌마(김영애)의 아들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붙들려 간 지 며칠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송변에게 어머니는 매달린다. 제발 우리 아들 좀 찾아 달라고. 아들과의 구치소 접견에서 온몸에 피멍이 든 아들의 모습을 보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모습은 그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연기였다. 

단 몇 장면이어도 이른바 씬 스틸러로서 김영애 만한 어머니 역할을 맡아 줄 사람은 없었다. 장동건 원빈의 어머니(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이정재의 어머니 역할은 고작 몇 씬이 되지 않았지만,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김영애의 어머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일단 약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 겁을 집어먹은 사슴 같은 눈이다가도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선한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눈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성우로도 손색이 없는, 가늘지만 가슴의 떨림이 그래도 전해지는 음성과 누구든 무장해제 하는 환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

황토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고 한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 황토팩에 중금속이 들어 있다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사업이 기울어졌고, 인체에 무해하다는 법원의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마음의 상처는 골이 깊었다. 아마 선한 심성에 이런 맘고생을 하여 몹쓸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어버이날에 김영애의 연기 장면을 다시 보았다. 단지 좋은 배우 한 명을 보낸 아쉬움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 주던 어머니 한 분을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님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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