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문란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생 의붓딸을 수차례 성추행해온 60대 가해자가 법정에서 한 얘기다.

피해자 A 양이 처음 의붓아버지 B 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2013년. 사건의 진행은 여느 가정 내 성폭력과 비슷했다.

의부는 A 양의 방에 들어가 A 양 옷 속에 손을 넣었고, 거실에서 큰 소리로 음란 동영상을 틀어놓곤 했다. 결국, 어머니께 이 사실을 고백한 A양. 어머니는 결국 사건 발생으로부터 3년이 지나고서야 경찰에 딸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경찰 수사 결과, B 씨는 수차례에 걸쳐 A 양에 성폭력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폭력 상담 기록이 남아있었고, A 양의 언니의 목격자 증언도 있었다. 결국, B 씨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진짜 악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B 씨 측은 재판 내내 "A 양은 평소에도 문란했다"고 지속해서 주장한 것. B 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A 양은 평소 행실이 범죄를 자초했다고 모욕당해야 했다.

그런데 왠지 익숙하다. 1997년도 개봉한 도미니크 스웨인 감독의 영화 '로리타(Lolita)'가 떠오른다. 의붓아버지 험버트에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영화 속 주인공 로리타의 나이는 중학교 1학년. 피해자 A 양과 비슷한 나이다.

영화 '롤리타' 한국 개봉 포스터.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는 시종일관 로리타가 얼마나 문란한 아이였는지, 얼마나 '색기'가 흘러넘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리타를 탐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금지된 욕망'으로만 비춘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래. 이런 아이에게 빠지지 않고서야 못 배기지', '험버트가 하필 로리타를 만났네'라는 동정심까지 갖게 된다. 관객이 공감하니, '험버트'의 범죄에는 자연스레 당위성이 부여된다.

비단 로리타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클리셰는 대중문화 곳곳에 만연하다. 겁탈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강간당하는 순간까지도 피해자를 '섹시'하게 묘사한다. '섹시한 여자는 강간당한다'는 생각은 천천히 사람들의 의식에 침투할 수밖에 없다.

극중 주인공이 겁탈당하는 장면. KBS 드라마 추노 갈무리

이렇게 자라난 의식들은 현실 세계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대중은 본능적으로, 피해자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지 상상하게 되고, 매력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이런 2차 가해는 포털 검색창에 보이고, SNS에서 떠돌며, A 양의 사례처럼 법정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글. SNS 갈무리.

그런데 이렇게 성범죄를 왜곡해 비춘 영화나 드라마, 음악은 '예술'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기 십상이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성폭력에 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이렇게 생성된 콘텐츠는 다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며 "왜곡된 성 관념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만들며, 결국 피해자가 범죄 사실에 관해 침묵하게 되는 문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이는 결코 예술이 아니다"라며,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자들, 이를 소비하는 대중의 성 감수성과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고, 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서도 문제가 되는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제재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전했다.

가장 크고 빠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대중이다. 대중이 외면하는 상품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A 양, 2차 가해로 고통받는 수많은 미투 피해자, 성폭력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대중의 비판적 시각과 비판적 소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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