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리랑' 스틸컷

 

"말도 마요. 첫 미팅 때부터 손을 잡자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기에 몸서리를 쳐야 했어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한 여배우A의 말이었다. 공식 인터뷰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 말을 여배우는 자리가 편안해지면서 '오프더레코드'(기록하지 않는 비공식적 발언)를 전제하에 은근히 흘린 말이었다.

사실 영화계에서 김기덕 감독이 신인이나 단역 여배우들의 인권을 유린한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히 나돌았었다. 이는 김기덕 감독이 한창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다닐 무렵, 국내 영화제의 술자리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스태프로 일했던 B씨는 "다반사지. 사실 우리가 여배우들 보호하느라 감독님과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무렵이라, 여배우 A와의 자리에서 슬쩍 "그런데 감독님 좀 너무 하시더라고요"라고 운을 떼보았었다. A는 "정말 다시는 같이 작품 안 하고 싶어요. 워낙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첫 미팅 때부터 조심했는데 역시나 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더라고요"라며 본인의 경험담을 불쾌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그러나 A도 B도 이를 공론화하기는 꺼려 했다. 늘 흉흉한 이야기의 끝은 "그렇지만 국가 위상을 드높인 세계적 거장이긴 하니까..."로 마무리 지어졌다.

배우 조재현과 김기덕 감독. 조재현은 자신을 향한 성폭력 피해 폭로가 이어지자 공식 사과를 하고 출연 중이던 작품에서 하차했다.

 

2018년 3월, 대한민국의 미투(#Me too) 열풍이 뜨겁다. 법조계를 시작으로, 정계, 문화계, 의료계, 교육계 등 사회 각계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울분을 털어놓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을 향한 시선이 더 이상 너그럽지 않다.

그렇지만 이는 불과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일뿐, 불과 몇달 전만 하더라도 여성이 성적 피해를 겪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도 드물었을뿐더러, 그런 용기를 내어본들 피해자를 향한 낙인이 더 진했다.

지난 6일 방송된 MBC 'PD수첩'에서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었으며, 조재현의 매니저에게조차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배우 C씨 역시 방송에서 "(조재현의 매니저가 성추행을 한 직후) 여성 단체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을 수 있냐고 하니, '당했냐' '증거를 가지고 있냐' '아니라면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답을 듣고 절망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실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피해 구제를 받기가 힘들었던 사회였다.

김기덕 감독이나 조재현은 특히나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영화 감독과 유명 배우였다. 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다. 그의 실체를 가까이에서 목격한 A와 B는 구태여 그 싸움을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세상이 이를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비겁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 여성의 인권은 더더욱 짓밟힐 수밖에 었었다. 그들에게 여배우를 향한 성폭력은 암묵적으로 공인된 관례였던 것이다. '그 누구도 제제할 수 없었던 일'은 그렇게 여러 괴물을 우리 사회에 만들어 냈다.

다행히도 2018년의 봄은 피해자가 당당할 수 있는 시대다. 지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애너벨라 시오라가 말했듯, 아주 긴 여정이었지만 세상은 천천히 바뀌어 갔다. 이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아야 한다. 미투 이후의 피해자 보호 및 가해자 처벌 제도 마련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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