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 이미지

영국 뉴캐슬에 살고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며 혼자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자신도 오랜 지병인 심장병을 앓고 있고 지금은 의사의 권고로 일을 잠시 쉬고 있다. 생계는 해야겠기에 우리나라의 고용지원센터 같은 곳을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얘기한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다.
그러나 이런 젠장할...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다니엘에게 공무원은 복잡한 실업구제 신청을 사무적으로 알려준다. 수십 번 업로드에 실패한 그는 옆집 흑인 젊은이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성공하나 돌아오는 답은 신청자격이 없다는 냉랭한 전화 음성뿐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종일관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와 형식적 복지의 사각지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지 시스템의 허술함 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 상위개념인 ‘인간의 존엄’과 ‘마지막 지키고 싶은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다니엘은 경제적 곤경에 처한 이웃 케이티와 서로 의지하며 우정을 쌓는다. 케이티는 런던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주한 싱글맘이다. 그녀는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리고 만다. 경비원은 이번에는 용서해 주겠다고 하면서 슬며시 명함을 건넨다. 언제든 전화하라며. 다니엘이 우연히 이 전화번호를 보게 되고 케이티가 소개받은 곳을 찾아가 보니…. 역시나 그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고 만다. 둘은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한다. 
돈이 떨어져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기 시작하는 다니엘. 다니엘을 유난히 잘 따르는 케이티의 딸은 방에서 혼자 추위에 떨고 있는 다니엘을 보고 말한다. ‘아저씨도 우릴 도와줬으니 우리도 도와드려야죠“ 
그 말에 다시 용기를 내서 지원센터를 찾아가지만, 웬걸 섣부른 영화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사회파 감독으로 유명한 영국의 켄로치가 만들었다.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국내에 이미 팬덤을 형성한 감독이다. 
칸느의 황금종려상은 아카데미의 작품상과 비견되는 상이다. 2016년도에 ‘나,다니엘 블레이크’로 이 상을 수상했다. 익숙한 헐리우드 영화 문법으로 보자면 무덤덤한 이야기에 우중충한 주인공으로 구질구질한 실업자의 행색을 그려 흥행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칸느는 그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 영화가 끝난 후 무려 15분간 기립박수가 이어지기도 했다. 영화의 무엇이 그토록 칸느를 열광케 했을까?

부자는 단 하나의 이유로 부자가 되지만 가난은 여러 사연으로 가난에 몰리게 된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실업과 생활고 해결이 국가의 일 중에 큰 하나이며 실업난 해소는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이슈이자 난제다. 사람은 일할 때 인간의 존엄이 지켜진다고 하지 않던가?
켄 로치 감독은 영국 대처 수상 이후 영국 사회가 안고 있는 복지국가의 허실과 시스템의 비인간성, 관료적 행태의 몰인간성에 집중했다. ‘가난은 너의 잘못이야.’ 라고 말하는 사회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다니엘 블레이크 장례식에서 케이티가 생전에 그가 남긴 글을 읽는 장면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