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예수 포스터. /출처: 씨네21
며칠 전 코스리에서 주관하는 ‘찾아가는 CSR교육’의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 말미에 한 학생이 영화를 몇 편 정도 봤냐고 내게 물었다. 직업이 문화평론가니 꽤 많은 영화를 보았겠거니 생각한 모양이다. 맞다. 무지 많이 봤다. 그러나 좋은 영화를 자주 본다. 영화 보기는 책 읽기와 비슷하다. 잘 만든 영화를 나는 자주 보는 편이다. 그중의 하나가 ‘몬트리올 예수’다. 다소 생소한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개봉한지 꽤 됐다. (DVD 출시가 되었고 IPTV등으로 보실 수 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내 보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국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다. 어느 한 쪽 편을 들었다간 분란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클린턴이나 오바마도 선거공약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하겠다고 하였으나 실행하진 못했다. 유대인 표를 의식한 정치공약(空約)이었을 뿐이다. 현실 외교나 정치에서는 갈등이 첨예화될 때 암묵적 인정이나 적당한 화해를 통해 문제를 일시적으로 덮는다.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종교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였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바로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전쟁터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 종교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고 자라고 번성했다. 예수를 신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삼위일체를 인정 할 것인가의 교리 차이 등으로 각자 갈라섰고 이후에는 역사에서 보여지듯 피의 살육과 대학살의 역사로 점철됐다. 인류가 이성적 사고를 조금만 한다면 얼마든지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의 문제는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그리 녹록하게 풀리진 않을 것 같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는 이천 년 전 예수처럼 똑같이 우리에게 묻는다. 종교란 무엇이고 신의 구원은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죽음 후 어디로 가는가? 근원적인 문제를 내러티브에 실어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우리에게 생소한 드니 아르캉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몬트리올 영화제 7관왕과 더불어 칸느에서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교회로부터 예수의 생애를 연극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다니엘(로테르 블리토)은 받은 대본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각본을 다시 쓰고 연극 연습에 들어가나 교회가 이를 알고 방해한다. 다니엘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여 무대에 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뜨악하게 극을 보던 관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의 모습과는 이질적인 예수의 파격에 서서히 빠져들고 공감한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나 주인공은 돌발 사고로 그만 크게 다치고 만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나 어느 한 곳 치료를 해주지 않아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데 다니엘은 자신의 장기 이식 의사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실천한다.

영화는 주인공 다니엘을 통해 현대 문명에 화석화된 예수의 모습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그것이 신이 가져야 할 본래의 얼굴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치유하는 과정이야 말로 보편적 종교의 가치라고 알려준다.

이제 며칠 후면 성탄절이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즐기는 날이 되었다. 성탄을 맞아 ‘몬트리올의 예수’가 다시 이 시대로 부활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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