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무비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동명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원작소설이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든 사례는 많이 있지만 오리지널의 감동과 재미를 영상으로 올곧이 옮기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원작이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수 400만명을 동원했다. 이병헌과 김윤석, 박해일을 주연으로 내 세운 블록 버스터 사극영화 치고는 다소 실망스런 수치다.

그러나 원작자의 의중과 행간의 의미를 성실하게 재현한 황동혁 감독의 노고를 깎아 내리고 싶지는 않다. (황감독은 며칠 전 청룡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볼 만한 사람은 다 봤고 호평과 아쉬움이 엇갈렸지만 영화 남한산성은 영화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된 작품으로 기억 될 것이다.

영화의 갈등은 선명하다. 우리가 어린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구한말의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어찌도 이리 비슷한지’라는 말의 원조격인 병자호란 시대로 우리를 소환한다. 명나라와 후금(이후 청이 된다)사이에 낀 조선. 사대로 똘똘 뭉친 척화파와 실리를 내 세워 화친을 도모코자 하는 주화파간의 대립이 날서게 부딪친다.

여러분은 이 시대 역사를 배울 때,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었는가? 젊은 시절엔 주전론의 수장인 김상헌이 그리 멋있게 보일 수 없었다. 최근에 가까운 기성세대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주화파인 최명길의 입장을 변호한다. 소설이나 영화 모두 명쾌한 정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작품은 관객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소설과 영화를 번갈아 보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김상헌이 급히 남한산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 길을 재촉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 사공에게 길을 묻고는 “청병이 곧 들이 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하고 묻자 사공은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그러자 김상헌은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사공을 칼로 벤다.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하며 김상헌은 울부 짖는다.

이 장면을 황감독은 익스트림 롱샷으로 잡아냈다. 눈발 날리는 얼어 붙은 강 위에 사공은 힘 없이 쓰러지는 듯 하다. 김훈은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감독의 연출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피갑칠을 가깝게 보여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에 감독은 클로즈업을 피한 것이다.

사공에게는 어떤 쪽이 승리를 하든 중요치 않다. 그는 한 겨울을 나야만 했다. 비록 곡식을 청병이 준 것일지라도.

영화는 한 명의 주인공이 더 있다. 대장장이 서날쇠다. 인조는 청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는다. 삼배고구두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는 치욕적 예를 치르고야 청은 물러갔다. 다시 조선에, 남한산성에 봄이 왔다. 서날쇠는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영화나 소설 모두 엔딩 장면은 서날쇠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작가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김상헌의 분통도 최명길의 아픔도 아니었다. 서날쇠다. 아니 그 전의 사공이다.

민초들에게 진정한 가치는 일과 곡식이다. 명분과 의리, 종묘사직과 왕의 안위보다도 더욱 가치 있는건 서날쇠가 다시금 쇠를 두들기며 땀 흘리며 일할 수 있는 조그맣고 허름한 대장간이었고 한 톨이라도 손 안에 쥐어지는 알곡이었다. 백성에게 중요한 사회가치는 이런 것이 아닐까? 사회가치가 추구해야할 방향도 여기에 둬야 하는 것 아닐까?

김훈은 “내 소설의 핵심은 서날쇠가 똥물을 뿌리며 봄 날을 기다리는 그 심정을 배워보자는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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