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월 기자.

[류미월 기자] 우리 집 아이들이 주말이면 배낭에 책을 넣고 찾아가는 곳은 도서관이 아닌 인근 카페다. 언제부터인지 한 건물에도 카페가 몇 개씩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카페 천국이 되었다. 돈을 주고 공간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식구라야 고작 다 모여야 네 명뿐인데 집이 꼭 시끄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무엇이 불편하고 자신을 옥죄는지 밖으로 나간다. 집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탐탁하지 않은 것일까? 집에 있는 방이 제구실을 못 하고 거리로 밀려난 느낌이다.

거리에는 방들이 많다. 노래방, 소주방, 대화방, 찜질방.... 친구도 없이 혼술, 혼밥, 혼영을 해도 불편하지 않다. 혼자라는 사실이 불쑥불쑥 단지 외로울 뿐이다. 현대인들은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 거리에 있는 방들을 섭렵하는 것도 부족한지 스마트폰이라는 방으로 숨어든다. 카톡 채팅방, 카페, 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상에서 친구 맺기 해 소통한다. 손바닥만 한 작은 방에서 가지치기하고 아는 사람은 물론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거리에 있는 방(房)들은 자기 존재를 거듭나게 하는 현실적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거리와 소통되지 않는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잠시 돈을 주고 머무르는 카페는 일시적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안주와 정착하기는 어려운 공간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몰라보아야 심리적 편안함과 자유는 극대화되는 걸까?

TV 프로의 ‘복면가왕’이나 ‘히든싱어’의 인기 비결도 익명성 뒤에 잠재된 에너지가 부담 없이 폭풍처럼 발산되기 때문이리라. 대학가를 지나다 보면 ‘코인 노래방, 1000원에 3곡’이라는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공중전화 박스 같은 작은 공간의 노래방이다. 유흥으로 부르는 노래도 어울려서 불러야 제 맛이 나는 시대가 아닌가 보다. 혼자 부르고 혼자 만족하는 한 평 공간에서 피에로처럼 흉내내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인지.

공광규 시인은 시 ‘담장을 허물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눈이 시원해졌다/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중략) 공시 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담장을 허물면 경계가 없어진 집이 초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텃밭과 앞마당을 거느린 어마어마한 집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한계 짓고 의미 없는 고집을 내세우는 우리네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한계를 깨고 나를 허물면 더 큰 나를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벽도 좋고 마음의 벽도 좋다. 나부터 필요 없는 벽을 허물고, 마음의 벽을 열고, 손을 내밀면 어떨는지? 마음 한구석이 휑해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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