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국가에서 공공선의 실현을 이끌어가는 전통적인 주체는 정부였다. 19세기 이래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국가에서 정부는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여 실업난부터 지역사회 재건까지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20세기 중반 이후 제3섹터인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비정부기구(NGO)의 옹호(advocacy) 활동과 정부와의 교섭능력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고,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엔,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가 글로벌 의제를 선도하고 전세계 현장에서 원조사업을 펼쳤다.

이에 비하면 기업이 한 국가, 나아가 국경을 넘어 사회발전의 주체로 대두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거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가들이 사회환원 차원에서 자선활동(philanthropy)을 펼쳐온 오랜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선의 책임’은 20세기 후반의 기업의 사회책임 논의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1960년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기업의 책임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준법경영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계속 진화해왔다. 1970년대 이후, 영국, 미국 등 서구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사회적·경제적 정의구현 문제가 부각되고 주요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됐으며, 소비자인 시민들이 주요 경제·사회 주체인 기업의 영향력에 관심을 갖고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평가해야 할 필요성에 주목하게 된 까닭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CSR 논의를 단순히 사회공헌 활동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책임을 좀 더 ‘시민의식(citizenship)’의 바탕 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CSR이 익숙한 한국에서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낯선 부분이 있다. 특히 해외에 비해 한국에서 이런 논의가 현저히 적은 데에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의식’에 대한 논의 기반 자체가 약하다는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Citizenship’은 개인이 한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 책무, 의식, 자질 등의 함의를 포괄하는 용어로, 국내에서는 맥락에 따라 ‘시민성’, ‘시민의식’ 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의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권리와 책무를 가진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 모두 학교교육을 거치면서 지식으로든 체험학습으로든 이런 내용을 배웠다. 개인의 기본권과 시민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개인의 행동이 타인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마음씀씀이에 대해 말이다.

기업시민의식(corporate citizenship)의 기본적 의미 역시 기업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지역사회 등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일정한 권리와 책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기업시민의식’ 개념은 기업이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고 인간 복지에 기여하는 사회적 역할과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시민의식이 반영된 CSR은 어떻게 다를까. 한 지역의 시민으로서 책무를 다한다는 관점에서 CSR에 접근하면 지속가능경영의 맥락에서 기업의 홍보나 마케팅 전략으로 여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접근은 워릭(Warwick) 경영대학원 교수인 웨인 비서(Wayne Visser)가 구분한 CSR의 단계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전략적 CSR은 전략과 관련 있는 (그러나 전략 변경의 필요가 없는) 사회문제나 환경문제 등 미시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두는 반면, 총체적 CSR은 사회나 생태계 등 거시적 상호연결 관계를 이해한 후 전략을 바꿔 인류와 생태계에 더욱 효과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구별하였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할수록 보다 많은 사회적 책임 요구가 생기고, CSR도 사회의 중요한 가치들과 더 긴밀히 연결된 맥락에서 수용될 것이다. 이제 기업들도 개별 사회공헌 활동이나 CSR 전략 차원에서 몰두하기보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다른 부분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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