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권 코스리 미래사업본부장

벽 폭설이 내렸다. 다행히 출근길은 많이 막히지 않았다. 사실, ‘다행히’ 막히지 않은 게 아니다. 다행은 뜻밖에 일이 잘되고 운이 좋은 상태를 말하는데, 새벽 출근길을 열어준 것은 운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노력이었다. 아파트 경비원은 새벽부터 아파트의 눈을 치웠다. 서울시의 공무원 7900명이 새벽부터 제설에 나섰다. 미디어들은 지속적으로 날씨와 제설현황을 보도했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평범한 일상이 무사히 도착한다.

어제 새벽은 조금 달랐다. 새벽 4시가 지난 시간, 법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잠시 후인 오전 6시 15분, 새벽과 아침이 교차하는 시간, 어스름한 공기를 뚫고 검은 코트를 입은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장소가 서울구치소가 아니라면, 그가 이재용 부회장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중년 직장인의 출근길처럼 보였을 장면이다. 실제로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굳게 입을 다문 채 서초동의 사옥으로 출근했다.

국민들이 궁금한 것은, 2015년 5월 26일 체결된 합병 계약의 실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이해할 수 없는 합병비율인 1(제일모직)대0.35(삼성물산)로 합병된다는 이 결정과, 이후 진행과정에서 국민의 노후와 일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국민연금이 어떻게 의결권 자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찬성했는지에 대해, 그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 부당한 권력의 개입은 없었는지, 이 부당한 개입을 위해 권력과 삼성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알고 싶은 것이다. 물론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고 해서 수사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최종적인 판결이 난 것도 아니다. 국민은 계속 지켜보고, 지켜볼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연관된 개념 중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라는 개념이 있다. 뜻이 어려우니 삼성물산의 2015년 사회책임활동을 종합정리한 2016 CSR보고서에서 컴플라이언스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참고해보자. ‘일반적으로 법규준수를 의미하나, 삼성물산에서는 법규와 회사규정 준수뿐만 아니라 사회규범 준수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 정유라의 승마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법규와 회사규정, 그리고 사회규범들이 모두 지켜졌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삼성물산의 CSR보고서는 ‘경영활동과 이해관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 30개를 선정했다. 중요이슈는 산업중요이슈, 국내외경쟁기업의 보고이슈, 미디어분석, 이해관계자 인터뷰 등을 기반으로 선정된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분명 합병 이슈였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중요이슈 30개엔 거버넌스(지배구조) 이슈가 없다. ‘합병 시너지 효과’라는 어정쩡한 이름의 이슈가 있을 뿐이다. 중요이슈 선정과정에선 이해관계자가 참여한다. 정부 및 언론, 임직원, 협력회사, 지역사회, 주주 및 투자자, 고객들이 이해관계자고 이들이 생성한 데이터들을 수집하거나 인터뷰한다. 이들 모두가 거버넌스에 대해 침묵했던 것일까. 아니면, 고의로 누락했스까? 고의로 인한 누락이길 바란다. 삼성이 무서워 이해관계자들이 침묵했다면,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의 참담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새벽은 매일 찾아온다. 매일의 새벽은 비슷하다. 직장인은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학생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겨울의 새벽은 어둑어둑하다. 어스름의 밑바닥엔 저마다의 자리에서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이들의 바쁜 숨결이 가득하다. 이들의 노력과 인내, 고통과 기쁨이 모여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된다. 권력은 이들을 대변하고 보호하고, 이들의 노력이 배반당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단한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일도, 내년에도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온한 일상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벽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의 규범과 법규를 준수하며 최선을 다해 구축한 우리의 생활과 일상이 가진 숭고함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못하겠다면 지도자의 자리를 떠나면 되고, 권력을 반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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