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테랑>이 누적 관객 수 1천만 명을 돌파할 기세다. 영화 <암살>이 8월 15일 천만관객을 돌파했으니, 만약 베테랑이 이번 주말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우리는 한 달 사이에 두 편의 천만 관객 영화를 보게 된다.

흥행에 성공한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인 문제를 정면에서 파고든다는 점이다. <암살>은 청산되지 않은 역사문제를, <베테랑>은 재벌의 비윤리성을 다루었다. 이 두 문제에도 공통점이 있다. 실화에 근거를 두고 있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실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더 정확히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과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이다. <암살>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독립군을, <베테랑>은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았던 재벌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스크린에 옮겼다. 이들은 우리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재였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실재에 우리가 이루지 못했던 바람들을 충돌시켰다. 독립군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들의 후손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 힘없는 자를 폭행하고 마약에 찌든 재벌은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우리가 이루지 못했던 바람을 ‘정의(正義)의 실현’이라고 한다면, 실재와 정의의 실패가 충돌하는 순간은 단순한 감동 이상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감동을 넘어서는 분노, 그리고 아직 실현해야 할 정의가 있음에 대한 환기.

영화 이야기를 접고 잠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최근 불거진 ‘음서제’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음서제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있던 풍습이다. 물론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채용특혜를 음서제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음서제는 공신의 자녀들이 관리로 채용되던 풍습을 제도화한 것이지만, 현재의 채용 특혜는 다행히 ‘제도화’가 되지는 않았다. 또 관직에 중용되던 과거와는 달리, 자율적인 경영활동을 보장받는 민간기업에서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더 주목한다. 힘 있는 사람들의 자녀에게 더 많은 기회가 더 쉽게 제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 대한 주목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모두에게 공정해야 할 기회가 불공정하게 박탈된다면 이 사회의 근본적인 신뢰가 흔들린다.

시장경제는 신뢰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가장 근본적인 신뢰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시장은 누구의 간섭도 없는 경쟁을 보장하며 인류에게 복리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시장경제의 바람, 즉 정의의 실현으로 본다. 그러나 음서제 사건으로 볼 때, 실재는 이러한 바람을 배신한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현대 시장경제에 봉건제의 음서제가 재림했으니, 오염이 맞다. 악당이 부활한 영화같다. 만약 시장경제가 순수한 경쟁에서의 부당한 힘의 개입까지도 공정한 시장활동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흔히 말하는 천민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차별점이 무엇인지 모호해진다. 만약 시장경제가 우리의 바람인데 천민자본주의가 그 실재라면, 분노는 당연하다.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한 지 500일이 지났다. 아직 가슴 속에서 세월호를 인양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습관처럼 만연한 무책임과 비리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 아픔을 잊는 것이 쉬울 리 없다. 현대판 음서제가 세월호 사건과 무엇이 다른가. 관행이 되어버린 탐욕과 무책임이 장차 한국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의 가슴에서 희망을 침몰시키고 있다. 청년들에게 지금 나라가 해주고 있는 것이 너무 없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멍을 안겨준 셈이다. 나라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당장 보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최소한 내 나라가 후지다는 실망감은 주지 말아야 한다. 영화에서나 봐야 할 일을, 더는 현실에서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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