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 지배와 독립 과정
현재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려면 영국의 미얀마 식민지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미얀마는 3번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1885년 전국토가 영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이후 영국은 분할통치를 통해 미얀마를 인도의 1개주로 편입시켰습니다. 또 주로 인도 출신이나 소수민족 출신을 고용해 다수의 버마인들을 억압하게 했습니다. 이는 당시 미얀마 내에 민족갈등을 야기해 국가가 분열되는 효과를 거두며 식민지배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또 독립이후 현재까지도 민족 간 갈등의 이유가 되고 군부 독재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60여년이 지난 1941년까지 농민, 승려, 대학생들이 주도한 수차례의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모두 영국의 탄압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이자 미얀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은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한 후 동맹휴학을 지도하며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독립을 표방한 타킨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에 대응해 영국정부는 1940년 여름 아웅산 장군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아웅산 장군은 일본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한편, 당시 일본은 1937년에 시작된 청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영국은 중국의 장개석에게 미얀마를 통해 무기 등의 전쟁물자를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미얀마를 장악한다면 영국으로부터 보급로를 차단해 청일전쟁에서 유리해 질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해방운동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미얀마의 독립을 돕게 됩니다.

아웅산 장군은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30인의 동지들’과 함께 당시 일본령이던 중국 하이난 섬에서 미얀마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전한지 한 달 뒤인 1942년 3월, 미얀마 독립군은 일본군과 함께 양곤으로 진격해 영국의 식민지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얀마에는 버 마우를 지도자로 정부가 설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며 억압했습니다. 이에 아웅산 장군은 1944년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동맹(AFPFL, 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을 결성,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물러난 뒤 버마는 다시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이전의 식민지배 시절 같은 억압은 없었지만 완전한 독립 또한 아니었습니다. 미얀마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아웅산 장군은 1947년 1월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총리와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었고, 이는 후에 미얀마 독립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같은해 4월 선거에서 아웅산 장군이 이끄는 AFPFL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아웅산 장군이 독립 미얀마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한 판세였습니다. 하지만 3개월 후인 1947년 7월 양곤의 회의실에서 회의 중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정적(政敵)에 의해 암살을 당했습니다. 아웅산 장군 암살사건으로부터 6개월이 흐른 후인 1948년 1월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했습니다. 독립 당시의 국호는 버마연방(Union of Burma). 아웅산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우 누가 버마 연방의 초대수상으로 취임했습니다.

2. 네윈의 군부 독재
독립이후 1962년까지 미얀마는 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미얀마는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의 최부국 중 하나로 손꼽히고 지하철이 개통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국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AFPFL의 내부 갈등이 심화되는 등 우누 수상은 국정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우누 수상은 1958년 10월 육군총사련관이었던 네윈 장군에게 임시 수상을 맡아 정국을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고, 네윈장군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이후 약15개월 간의 군정 끝에 1960년 2월 6일 총선거를 실시해 정권은 민간인에게 이양되었습니다. 민정이양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된 AFPFL출신인 우누 수상이 군정 후 최초의 민간내각 수반으로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3월 2일 미얀마의 육군총사령관인 네윈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다시 군정에 들어갔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미얀마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하나의 연방행정단위로 축소함으로써 중앙집권정부 대신 연방을 이룩하라는 샨주(州) 일부지도자들의 주장과 3월 2일로 발효된 무역의 국영화 정책에 대한 야당경제계 및 군부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같은해 7월 네윈의 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양곤 대학에서 있었습니다.
<사진=네윈 장군> 네윈은 군대를 보내 시위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고 학생
연합 건물을 파괴했습니다.

1962년부터 1974년은 군부 독재에 의한 ‘버마식 사회주의’에 의해 통치됐습니다. 1962년 네윈은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을 창당, 1964년 BSPP만을 ‘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으로 선언했습니다. 네윈은 강력한 군부 독재를 바탕으로 많은 보건, 교육, 경제 등 다방면에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개혁의 결과가 좋지 않아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사회발전 속도는 더뎌져갔습니다.

1974년 네윈은 의회를 해산하고 국칭을 버마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으로 변경하는 등 미얀마식 사회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81년 11월 네윈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산유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의 지도자이자 실권자로 남아 1988년까지 미얀마를 좌지우지했습니다.

1962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군부 독재 기간 동안 산발적인 반정부 운동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주로 대학생들이 대도시의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시위를 주도했으며 이로 인해 종종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1974년 6월 전국의 100개 이상 공장이 총파업에 동참했으며 군부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여명의 민간인에게 발포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우 탄트 전 UN사무총장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이 장례식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발발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어진 몇차례의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인 ‘8888운동(Four Eights Uprising)’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988년 7월 네윈은 당수를 사임했습니다.

※ 다음 칼럼에서는 1988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을 다루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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